날씨가 추워지니 점점 갈 곳이 줄어들고 있다. 노인정이나 갈까?
노인대학에 수강 신청을 할까?
노인복지회관으로 가야지. 가면 뭐하나 또 외톨이 신세인걸 이놈의 여편네는 먼저 가고 지랄이람. 손자, 손녀가 보고 싶은데 불쑥 먼저 찾아 가기도 이상하다. 이놈의 도시엔 젊은 애들, 30대 중년, 노인들이 갈 거리가 딱딱 나누어져 있다. 저 길을 가면 안 되고 이 길만 다니라고 무언중에 딱지를 붙여 놓은 것만 같다.
함부로 들어서면 안 된다는 빨간 경고 스티카 도시 곳곳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골목으로 들어간다. 대로변은 어쩐지 도발적인 모습으로 달려 들것만 같다. 물론 밤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꼭 전화가 온 것처럼 사지가 떨려온다. 얼른 빼어들었다. 감감 무소식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
꽉 쥐었다. 나에게 세상이 있을까?
 
 골목에 비켜서서 재빨리 쳐다본다. 여기만 나가도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시장은 어떻고?
거기 세상이 있는 거야 맞아. TV속에도 세상은 있어, 사랑하네 못하네, 사네 못사네 채널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평균 4개의 세상이 핑핑 돌아가고 있지. 저 거리를 봐!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딱정벌레처럼 밀려가고, 밀려오고, 또 종종걸음 치면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도 따라가 볼까. 아니야, 저건 내 세상이 아니야. 낯설고 생소해(그때 진동소리 들려온다)(휴대폰을 공격적인 자세로 귀에 갖다 댄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라구요?
즉시 대출해 준다구요. 별일 없수다.

 나이가 들면 두려움의 감각도 슬픔의 감정도 다 닳은 신발짝처럼 엷어지고, 무디어 진다는데 난 아직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칼날 같아 잠을 자다 소스라쳐 깨어나지.
그리고 진저리쳐, 여기가 어딘가?
여기가 어디야?

 뼈가 저릴 정도로 공허함이 밀려온다. 걷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그 길을 걸어서 오늘까지 이르는 동안 있는 것은 무엇이고, 줄어든 것은 무엇이랴. 있는 것은 익숙하게도 몸에 스며든 병, 상념, 울화, 부대끼고 시달리다 못해 제 모습을 잃어버린 몸뚱이 그 자체였다. 줄어든 것은 잇몸에서 달아난 어금니가 그렇고, 못들을 소리만 듣다가 열이 오른 나머지 아득하게 들리는 두 귀가 그렇고 어지간히 빗고 감기를 해대서 그런지 이분일은 은발이고 나머지는 빠져버린 쑥대머리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줄어든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사라 진 것도 있었다.

 첫 사랑, 짝사랑, 친구들, 젊었을 때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은 오는 것이었다.
오는 세월을 붙잡으랴?
가는 세월을 붙잡으랴?

 병이 깊어지고, 꿈이 사라지고, 뼈마디가 쑤시고, 몸이 무거워지고 기억도 가물가물 거리는걸 보면 그동안 세월을 흘러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에 매달려서 허우적댄 것이 늙어버린 것이고, 세월이 나몰래 스믈스믈 기어 들어와 이만큼 낡아 버린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 역할없는 역할로서의 비 생산적 존재라고, 퇴화 했다고, 아니야, 눈뜰 근력도 있어, 산에 오를 지구력도 있어, 유연성, 순발력, 균형감각까지 갖추고 있다구, 허리도 휘지 않았잖아, 관절염? 없어,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는가? 그동안 우린 무얼했지, 우리에겐 뭔가를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어, 사랑을 할 시간도충분치 못했어. 늦지 않았지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 일하고 싶어, 의욕도 있고 능력도 있다니까.

그래(다급한 전화벨소리)뭐라고 그 친구가 어느 병원이여(목이 멘다)너희도 곧 늙어, 너희는 평생 젊은줄 알아, 아직은 일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네. 나는 싫다. 뜨거운 가슴이 점점 식어 가는 걸 느껴. 더 식기 전에 해야 돼 뭔가 있어야 돼! 어제는 이미 지나갔어. 오늘 86,400초의 시간은 내거야. 우리 마음대로 사용 할 수 있는 거야. 내일도 와, 내일에 꿈을 꾸고 싶어, 시간을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두운 곳에서 허황된 세상의 꿈을 붙잡고 살고 싶진 않아. 오늘도 고목나무에 하얀 꽃이 핀다.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고 불편하던 다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뿐사뿐 떨어진다. 골 파인 볼에는 열여덟 처녀 총각의 홍조가 되살아나고 주름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면 아기가 되고, 청년이 되어, 외로움, 고독, 고민은 사라지고, 사랑, 낭만, 아름다운 인생을 펼쳐 보일 것이다. 잃어버린 세월이 꿈이 되어 흐드러 진다. 백발이 횐 꽃이 되어 인생의 무대에 다시 태어난다.
오늘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잠을 청한다. 자다가 깨지 않으리라.

논설위원 김성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