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일영 문화기획자. ⓒ고일영

2001년 오산에서는 처음으로 영어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연극에 끼 있는 학생들을 공모하였지만,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라서 왔다가 주눅이 들어 포기하는 학생도 많았다.
나는 선발된 학생들에게 대본을 보며 영어 발성법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될 때에는 동작하면서 무대에 오를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눈엔 누가 어떤 배역에 어울릴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아마추어 연극은 전문극단과는 달리 천부적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협동을 통해 소통하는 작업이기에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하다. 설령 조금은 어색했을지라도 관객들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으므로 조그만 실수쯤은 이해하면서 봐준다.
“너는 어떤 배역 맡고 싶니?”
배역 선정을 위해 물으면, 그 학생의 속마음은 모르지만 대부분 짧은 대사의 배역을 하겠다고 한다. 대사를 영어로 하려니 아무래도 힘들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 연극은 자신 있었는데, 영어연극이다 보니 아찔했던 모양이다.

일단 배역이 정해지면 대부분 학생은 선택을 후회한다. 연습하다 보니 긴 대사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주연 여배우의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prompter)를 하던 여학생은 어느새 주연의 대사를 모두 외웠다.
어쩌다 주연이 빠지는 날에는 무대에 파트너의 대역으로 올라갔다. 상대방의 대사를 척척 받아내자 남자 주연 배우가 내게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쟤가 더 잘해요.”
프롬프터 여학생도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주연을 맡을 걸’ 하는 눈치이다. 배우의 동작까지 관찰하며 대사가 막힐 때 읽어주다 보니, 어느새 그 길고 긴 대사를 통째로 외워버린 것이다.
사실 연극에서 대사는 독백(soliloquy)이 아니라 대화(dialog)이다. 둘 이상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관객들에게 감동으로 전달돼야 한다.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 대화이다. 대화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독백도 아니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백’(an aside)도 아니다.

▲ 오산시의회 의원들은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대화를 해야 한다. ⓒ태다운

요즘 NLL로 시끄러운 국회 못지않은 곳이 또 있다. 바로 오산시의회다. 대화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독백만 한다. 이미 관객인 시민은 무엇을 말하려는 지 다 알고 있는데, 의원들끼리는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제발 이제부터는 방백은 그만하고, 서로 대사를 하며 대화체로 주고받기 바란다.
인간에게 귀는 두 개고 입이 하나인 이유가 잘 듣고 조심스럽게 말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지 않던가?
말은 하는 것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시민의 대표라는 그분들은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도 한 번 안 해봤단 말인가?

* 방백: 극 중 인물이 상대역과 대화 중에 관객에게는 들리지만, 상대역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하고 혼자 하는 대사.

고일영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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