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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건릉’, 수원 화성의 축성과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정조
김희태 기자 | 승인 2017.05.31 08:37

융릉과 함께 화산에 자리하고 있는 건릉은 정조(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 김씨(1753∼1821)의 합장릉으로,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부흥을 이룬 군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조가 재위할 당시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다. 조선 내부에서는 기존의 체제인 성리학적 질서와 경직성을 비판하며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서로 견제하며,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낸 조선판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정조를 떠올리면 융건릉에서 보듯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한 내용을 떠올리게 되는데, 오늘은 정조의 즉위와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추존과 현륭원의 이장, 그리고 수원 화성의 축성과 정조 시대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융릉 인근에 자리한 정조의 건릉
제향 공간인 정자각의 전경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었던 정조

정조의 가계를 살펴보면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간 갈등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갔고, 사도세자의 광증 역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결국 나경언의 고변과 함께 사도세자의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의 요청 등으로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우리 역사에서 임오화변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죽은 뒤 정조는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의 아들로 입적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던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부분의 정통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조치였지만, 정조에게 있어 이 조치는 혈연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던 것도 모자라 법적인 관계까지 부정 당하는 아픔을 안기게 된다. 정조는 즉위한 뒤 자신의 법적인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이는 한편 양주시 배봉산에 있던 수은묘를 현륭원으로 높여 화산으로 이장하게 된다. 당시 정조는 영조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에 대해 한 글자도 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왕으로 추존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정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던 부분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전면에서 바라본 건릉의 능침 공간
건릉의 봉분과 상석

현륭원의 이장과 신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

현륭원이 이장된 화산은 본래 수원부읍치가 자리하고 있던 수원고읍성으로, 이 땅은 선조 이래 조선 왕릉의 후보지로 거론이 되던 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수원고읍성에 대해 둘레가 4035척의 흙으로 쌓았다고 했는데, 읍성이 허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후대의 기록인 1863년 김정호에 의해 편찬된 ‘대동지지’에는 읍성의 존재가 사라지고, 수원도호부의 존재가 드러나는데, 수원 화성의 축성과 함께 수원부읍치는 수원도호부로 승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의 기록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당시 건릉과 현륭원의 위치와 관련해 화산의 남쪽 자리라고 말하고 있어, 옛 ‘수원부읍치’인 화산 지역이 능원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화산에 현륭원이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에 있던 수원부읍치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정조는 새로운 수원부읍치로 수원 화성을 축성하게 된다. 흔히 수원 화성을 신도시라고 이야기하는 이면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1794년 1월부터 시작된 수원 화성의 축성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에 대한 방비로 쌓은 측면과 현륭원 이장과 함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공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농번기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한편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만석거와 축만제 등을 조성해 농사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1796년 9월 축성이 완료된 수원 화성은 새로운 신도시의 면모를 드러내며, 팔달문의 의미처럼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건릉의 능침에서 바라본 정자각의 모습
건릉의 능침에 세워진 무인석
배면에서 바라본 건릉의 전경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정조의 건릉

정조가 재위하던 시기에 조정은 크게 노론과 함께 정조의 후원을 받은 실학자들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던 시기로 조선의 활력이 넘치던 시기였다. 당시 이러한 실학사상은 사회 각 부분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크게 국학과 과학의 발달로 나눌 수 있다.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로 서술했던 유득공의 발해고를 비롯한 자주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적 기록, 지리, 예술 등의 국학 분야에서의 발전과 청나라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한 뒤 홍대용의 천문의로 대표되는 천문학과 농업, 의학 등의 분야에서의 발전상을 보였다. 이는 정조가 이념논쟁보다는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의미했고, 그 연장에서 실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조선사회는 급속히 구체제로 돌아가게 되고 과거로 되돌려졌다. 정조의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첨정을 했던 정순왕후 김씨는 자신의 일족인 안동 김씨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와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때문에 조선에 있어 영광스러운 시기를 열었던 임금이 세종이었다면, 그 영광의 시대의 문을 닫은 것은 정조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정조가 잠든 건릉은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의 융릉과 함께 화산에 조성이 되었는데, 최초 정조의 첫 왕릉터는 융릉에서 멀지 않은 옛 강무당터에 자리하고 있다. 죽어서도 아버지의 발끝에 잠들어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기를 원했던 정조의 효심을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이후 효의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천장이 되었다. 조선의 르네상스였던 정조의 시대, 아버지를 향한 효심은 지금도 수원시와 화성시에서 정조가 아버지의 능행길에 나섰던 여러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데, 수원과 의왕의 경계에 자리한 지지대비를 비롯하여 능행길에 세워졌던 여러 표석을 찾을 수 있어 그 의미를 더하게 한다.

김희태 기자  sora77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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