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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 속 비밀을 드러내는 물리학
고재현 교수(한림대학교 응용광물리학과) | 승인 2017.08.08 10:49

액션 페인팅이라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추상표현주의 세계를 구축한 미국의 화가 잭슨 폴락. 그의 작품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있을 듯 뿌려진 물감의 무작위적 패턴 속에 어떤 독창성이 숨어 있길래 작품의 가치를 높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이 물리학자로부터 나왔다. 미술사 학위도 가지고 있는 물리학자 리차드 테일러는 폴락의 대표적인 작품에 표현된 물감의 궤적들을 분석한 결과, 그 속에 두 가지 차원의 프랙탈 구조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스스로의 패턴을 여러 배율로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프랙탈 구조는 폴락이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는 몸동작이나 물감이 떨어지는 구체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카오스의 물리학이 폴락의 작품들이 표현한 혼돈과 우연 속에 숨어 있던 패턴의 규칙을 밝혀낸 것이다. 이런 프랙탈 분석은 21세기 초에 폴락의 작품이라고 주장된 여러 작품들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활용되기도 했다.

패턴 인식이 예술 작품의 진위 판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면, 작품을 구성하는 안료의 정체를 밝혀서 해당 안료가 사용된 시기를 확인하는 것은 작품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르게 가지고 태어난다는 홍채가 사람을 구분하는 생체인식의 수단으로 쓰이는 것처럼,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들의 “홍채”는 바로 분자가 추는 고유한 춤, 즉 분자 진동이다. 모든 분자들은 자신들의 구조에 걸맞는 방식으로 춤추며 자신만의 독특한 진동을 나타낸다. 이 때 각 진동의 진동수(일 초에 진동하는 횟수)가 바로 분자를 구별할 수 있는 ‘분자의 신분증’에 해당한다. 이 고유 진동수는 물질에 레이저를 쏘고 나서 이에 반응해 물질이 방출하는 산란광을 분석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 레이저의 진동수가 분자의 고유 진동수만큼 변조되어 산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광법은 이를 최초로 실험적으로 구현한 인도 물리학자의 이름을 따서 라만(Raman) 분광법이라 부른다. 미술 작품을 구성하는 물감에 라만 분광법을 적용해 산란광을 분석하게 되면 물감을 구성하는 분자들의 정체가 하나씩 드러난다.

1981년 한 예술품 수집가가 영국의 시골 저택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라파엘의 16세기 작품인 ‘시스티나 성모(Sistine Madonna)’와 놀랄 정도로 닮은 원형의 그림을 구입했다. 이 그림이 라파엘의 작품이라 확신한 수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해당 작품에서 얻은 소량의 시료에 대해 레이저 라만 분광법을 적용한 결과, 그림 제작에 사용된 안료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된 성분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해당 작품이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것, 따라서 라파엘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런 분광 분석법은 비단 미술작품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드러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범죄 현장에서 취득한 각종 증거품의 성분 분석이나 생산 공정의 관리, 마약 탐지 등 그 응용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다.

현재 라만 분광법은 단 하나의 분자가 보이는 진동까지 탐지해낼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게다가 작품에서 시료를 채취할 필요 없이 미세한 탐침을 표면에 근접시켜 비파괴 방식의 측정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분석 장비의 소형화는 각종 현장에서 직접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휴대형 기기의 진화로 이어지고 있다. 즉 미술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감정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진품명품’과 같은 감정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분야의 미술품 감정위원들이 출연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는 패턴인식 능력이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이 각종 분광 분석 장비를 들고 스튜디오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알파고가 바둑계를 평정해 버리고 화성 위를 돌아다니는 로봇이 화성 토양의 성분을 정밀 분석하는 오늘날, 이와 같은 전망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고재현 교수(한림대학교 응용광물리학과)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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