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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강화도령 원범이 조선의 왕이 되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7.08.09 02:40
홍살문에서 바라본 예릉. 전면에 참도와 정자각을 볼 수 있다.
제향공간인 정자각의 모습

우리에게 강화도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철종(재위 1849~1863)과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1837∼1878)가 잠들어 있는 ‘예릉’은 서삼릉 중 하나의 능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철종의 이름은 원범으로 본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는데, 이는 그 가계를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1754~1801)으로 사도세자의 서자이다. 정조에게는 이복동생이 되는 셈인데, 이 은언군의 아들이 전계대원군(1785~1841)으로 용성부대부인 염씨(1793~1863)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가 바로 원범이었다. 하지만 때는 왕조 시대로 왕위에 위협이 되는 왕실의 인물은 종종 비극적인 운명을 맞기도 했는데, 은언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은언군은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로 유배된 뒤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순조 때 은언군의 자녀들에 대한 방면이 이루어졌지만, 1836년에 벌어진 ‘남응중의 역모사건’으로 원범을 비롯한 일족은 강화도로 유배가 되어, 최종적으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강화도에 계속 머물게 된다. 오늘은 이러한 철종의 생애를 통해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가 잠든 예릉의 능침 전경
예릉의 우측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의 모습
예릉의 좌측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의 모습

무기력했던 철종의 치세와 백성들의 민란

강화도로 유배된 원범은 왕족이라기에 무색한 일반 평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를 반증하듯 당시 왕족에게 붙던 ‘군호’도 없었다. 때문에 원범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치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가 한 몫을 했다. 이들은 순원왕후 김씨(1789∼1857)를 움직여 원범을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원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자신들의 정치권력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인물을 선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때문에 당시 항렬상 헌종의 후사가 될 수 없는 원범을 무리하게 옹립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편 강화도를 떠나 한성으로 돌아온 원범은 덕완군으로 봉해지고, 순조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왕위에 올려지다 보니 철종은 사대부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 조차 조롱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이미 정치권력의 추가 안동 김씨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도정치의 시대라 정작 왕이 된 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이 시기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주농민항쟁’이었다. 1862년 당시 경상우병사였던 백낙신의 탐욕과 조세제도에 대한 불신은 이내 ‘진주농민항쟁’의 불꽃이 되어 삼남지방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일련의 사태에 놀란 조정은 안핵사 박규수(1807∼1877)를 파견하고,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게 되는데, 문제는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이들은 너무 개혁적인 요구안이 올라오자 이를 무시하고 없었던 일이 되면서 결국 무기력했던 철종의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재위했던 철종은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1864년 1월, 재위 14년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때 철종의 나이는 불과 32살이었는데,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던 철종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몸을 버린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사실 철종을 변호하자면 딱히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라고, 그 허수아비가 진짜 왕 노릇을 하겠다고 하면,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다는 점에서 철종이 왕위에 오른 그 순간, 이미 이러한 사실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흥선대원군(1820∼1898)과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고종(재위 1863∼1907)으로,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철종을 ‘장황제’로 추존하면서 비각에는 황제의 명칭으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른 왕릉에 비해 앞으로 많이 나와 있는 장명등. 그 형태 또한 독특하다.
쌍릉으로 조성된 예릉의 봉분. 주위로 난간석과 봉분의 앞에 상석과 혼유석이 자리하고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예릉의 능침 전경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가 잠든 ‘예릉’, 전통적인 조선왕릉의 양식으로는 마지막으로 조성되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철인왕후 김씨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철인왕후 김씨는 안동 김씨의 일원으로 순원왕후 김씨의 근친이자 영돈녕부사 김문근(1801∼1863)의 딸이었다. 당시 철종이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던 것이 안동 김씨와 순원왕후 김씨인 탓에 왕비를 정하는 것조차 철종의 의사와는 무관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동 김씨의 일원으로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철인왕후 김씨를 곱게 보지 못했던 철종은 둘 사이에 어렵사리 얻었던 원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뒤로 철인왕후 김씨를 찾지 않았다. 이후 철종이 세상을 떠난 뒤 고종 때 대비의 존호를 받기도 했으며, 1878년 창경궁 양화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철종이 묻힌 ‘예릉’의 좌측에 자리하게 되니 이것이 현재 서삼릉에서 볼 수 있는 ‘예릉’의 모습이다. 무기력했던 철종의 치세와는 별개로 ‘예릉’은 웅장하고, 위엄 있게 조성이 되었는데, 이는 고종의 왕권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후 고종과 순종(재위 1907~1910)의 능이 황제의 능으로 조성된 까닭에 조선왕릉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왕릉이다. ‘예릉’은 3단으로 조성된 참도를 비롯해 제향공간인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넓은 사초지를 지나 예릉의 능침공간에 오르면 좌우로 문인석 1쌍과 무인석 1쌍, 석마 2쌍이 자리하고 있다. 능침공간의 중앙에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다른 왕릉에 비해 많이 앞으로 나온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지붕이 앞선 장명등과는 차이를 보인다. 쌍릉의 형태로 조성된 ‘예릉’은 각각의 상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난간석과 함께 좌우로 망주석이 1쌍 자리하고 있으며, 능의 뒤로 석양과 석호가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철종의 시대는 조선의 비극이었는데, 역대 조선의 그 어느 왕들보다 정통성과 왕권이 취약했던 철종의 시기는 밖으로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내부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전횡으로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봉기했던 그런 상황이었다. 조선의 지배 이념이던 유교의 보수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현상을 경직되게 만든 한 요인이 되었으며, 이제 바야흐로 조선은 냉엄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각축장으로 맨몸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역사의 현장,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다.

김희태 기자  sora77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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