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연재
조선왕릉 편 - 아들을 두 번 죽여야 했던 영빈 이 씨의 ‘수경원’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7.10.09 16:0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자리한 서오릉에는 사도세자(추존 장조, 1735~1762)의 어머니인 영빈 이 씨(?~1764)의 ‘수경원’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수경원’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을 하면서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대학교회인 ‘루스채플’이 들어섰다. 천장할 당시 정자각과 비각은 옮겨가지 못해 지금도 연세대학교 교정에 남아있으며, 비각 안의 비는 별도로 옮겨 현재 ‘수경원’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본관은 전의(현재 연기군)로 1701년 궁녀로 입궁했던 영빈 이 씨는 영조(재위 1724~1776)에게 승은을 입은 뒤 정 1품인 빈(嬪)에 오르게 되는데, 영빈 이 씨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남달랐다. 이는 영조와 영빈 이 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비롯해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등 1남 5녀를 낳은 것과 영빈 이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영조가 애통해하며 그 장례의 격을 후궁 가운데 가장 높은 예로 했다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영빈 이 씨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을 보면 선희궁(영빈 이 씨)이 울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고하고, 이와 별개로 은혜를 베풀어 세손 모자를 평안하게 해줄 것을 고하게 된다. 이후 영조는 영빈 이 씨의 뜻을 받아들여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빈 이 씨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아야 했다.

서오릉 내 자리한 ‘수경원’으로 가는 길
‘수경원’의 비석. 본래 비각에 모셔져 있었으나 현 위치로 천장을 하면서 비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비각은 정자각과 함께 연세대학교 교정에 남아있다.
‘수경원’의 원침 전경. 천장한 뒤로 별도의 제향 공간과 사초지가 없어 초라한 모습이다.

세손을 살리기 위해 사도세자를 버리다.

친아들을 직접 단죄하기 위해 영조에게 처분을 고했던 영빈 이 씨의 행동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봤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영조에게 유일한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그 기질과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부에 대한 시각 차였는데, 영조의 입장에서는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 씨(1670 ~1718)의 신분이 내내 혈통적 콤플렉스로 작용했던 까닭에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것을 공부로 봤다. 하지만 기질적으로 무인적 기질이 강했던 사도세자는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아들을 위해 직접 책을 만든 영조로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실망과 사사건건 간섭을 하며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사도세자는 이러한 영조와의 갈등으로 정신병이 생겨 살인과 기행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존재는 점차 영조와 조정, 그리고 세손에게 골칫거리가 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경궁 홍 씨와 장인인 홍봉한 역시 세자를 포기하고 세손(정조, 재위 1776~1800)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선회를 하게 되고, 영빈 이 씨 역시 자칫 세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처분을 선제적으로 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이후 세손은 더 이상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추존 진종, 1719~1728)의 양자로 입적이 되면서, 본의 아니게 아들을 두 번 죽이게 된 영빈 이 씨는 사도세자를 뒤따르듯 삼년상이 끝난 해인 1764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빈 이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영조는 ‘의열(義烈)’이란 시호를 추증하게 되고, 이때부터 영빈 이 씨의 묘는 ‘의열묘’로 불리며,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신촌동에 묻혔다. 이후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이 되면서, 영빈 이 씨의 ‘의열묘’ 역시 격이 높아져 ‘수경원’으로 높여졌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표와 상석. 향로석의 모습
‘수경원’의 문인석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평생 자책 속에 살았던 영빈 이 씨

서오릉으로 천장한 뒤 ‘수경원’은 서오릉의 매표소를 지나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원역(園域)이다. 하지만 천장할 당시 정자각과 비각을 옮겨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규모는 생각보다 작고, ‘소령원’이나 ‘수길원’ 등 다른 원역에서 보이는 사초지와 제향 공간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수경원’의 외형을 살펴보면 원침으로 향하는 우측에 비각에서 옮겨온 비석이 세워져 있다.

봉분의 뒤에 설치된 석양의 모습
석호의 모습. 표정이 매우 익살스럽게 생겼다.
배면에서 바라본 ‘수경원’의 전경

이 비석을 지나면 바로 ‘수경원’의 원침과 마주할 수 있는데, 원침은 크게 별도의 난간석이 없는 봉분과 봉분의 중앙으로 묘표와 함께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봉분의 뒤로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했으며,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이 설치되었다. 원침의 좌우에는 문인석과 석마가 각 1쌍이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영조의 후궁들 가운데 남다른 총애를 받았고, 자신의 아들을 버리면서 지켜낸 세손이 훗날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정조였다. 그랬기에 정치적으로 보자면 사도세자의 처분을 고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빈 이 씨에게 아들을 버린 이 날은 어쩌면 어머니로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와 함께 세손의 법적인 아버지가 죽은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철저하게 사도세자의 존재가 부정이 되는 등 의도하지 않게 아들을 두 번이나 죽여야 했던 영빈 이 씨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그곳, 바로 ‘수경원’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희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447-800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26-2 3층  |  대표전화 : 031)373-8770  |  팩스 : 031)373-8445
등록번호 : 경기, 다01040  |  발행인 : 조백현  |  편집인 : 조백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조백현 대표
Copyright © 2017 뉴스타워.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