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자 전 의원

“나도 이대 동창이야. 대학시절 너를 본 적 있어.”

김현자 전 의원이 속삭이듯 말하며 여연구와의 대면을 하게 된 날은 1984년 4월이었다. 제네바에서 열린 IPU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당시 여연구는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의장 등으로 활약한 북한의 거물급 여성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독립 운동가이며 해방 후 테러범에게 피살된 여운형의 둘째딸로 더 알려져 있다. 11대, 12대 여성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김현자 전 의원은 여연구와 일제시대 이화여대를 함께 다녔다.

“이화여전 재학 중 여연구는 월북했어요. 그런데 IPU회의 때 내가 먼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인사를 건넸어요.”

남과 북의 단절로 낭만과 추억, 인간애도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수행원이 따라다니며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졌지만 잠시 현실을 잊었다. 그간의 안부를 물었고 선물도 주고받았다. 여연구는 1947년 7월 이화여전 재학 중 아버지 여운형을 따라 북으로 갔고, 그 가족은 김일성의 보호 아래 지냈다. 곧이어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 후는 평양외국어 대학 교원이 되어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남사업에 발을 들여 놓으며 북의 여성을 대표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여연구를 만나게 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서울에 한번 꼭 가고 싶네. 내 생애 고향땅 서울을 갈 수 있을까?”

여연구는 당시 이렇게 말하였다. 왜냐면 당시 남북관계의 험악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1983년에 아웅산 테러로 전 대통령을 수행한 고위직관리들이 참사를 당했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둘의 만남이 이뤄진 건 훌쩍 시간이 흐른 뒤다. 1991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세미나 자리였다. 여연구는 15명의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나타났다. 그녀는 46년 만의 고향방문이었다. 아버지 여운형 선생의 묘소도 방문하고 최초의 남북 여성들의 공개적인 만남까지 이뤄졌다. 국가적으로도 여연구 개인적으로도 물론 큰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리라.

당시 온 국민의 관심이 주목됐다. 만찬회장은 흥분으로 뜨거웠다. 민족적인 화해가 여성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잠시 기대했다. 그러나 46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격이 너무 컸나보다. “여성이 평화와 통일에 앞장섭시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모성애로 화해의 다리를 놓읍시다”라고 외쳤지만 좁혀지지 않는 견해차로 북한 측은 일정을 단축하고 떠났다. 이후 여연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1996년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일에 김현자 전 의원은 함께했다. 1940년대 이리여고를 졸업하고, 지금의 이화여대인 경성여대에 지원. 해방 이후 영어 교사가 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콜롬비아 대학에서 세계YWCA 청년대표로 참석했다. 크고 작은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서 세계를 누비고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지금 김현자 전 의원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흔의 문턱에서 수필집을 출간하고, 지금도 매일 노인복지회관에서 중국어를 공부한다. 라인댄스를 배우며 노후를 보낸다. 화려했던 젊은 날 이루지 못한 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크지만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김소라 기자  sora77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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