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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화성, 수원 편 - 새로운 신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과 수원시의 변천 과정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1.07 15:47

현재 수원시의 상징인 ‘수원 화성’은 1789년 사도세자(추존 장조, 1735~1762)의 현륭원이 옛 수원부의 읍치인 화산으로 이전이 결정되면서 이를 대체할 신도시로 조성이 되었다. 당시의 관점에서 왕릉이나 원이 조성될 경우 사방 10리 내에 민가나 무덤 등은 철거하거나 이전을 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화산 아래에 수원부의 읍치가 위치하고 있다 보니 하나의 도시가 통째로 이전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정조가 ‘수원 화성’의 축성에 보인 관심은 남다른데, 우선 1793년 수원 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키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기초자치 단체인 수원시를 특별시로 만든 것과 다르지 않는데, 화성유수는 종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임명 되었으며, 한양의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 당시 ‘수원 화성’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초대 화성유수로 부임한 인물이 번암 채제공(1720~1799)으로, 화성유수에 정승을 임명한 것은 도시의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이외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종 5품 이상의 판관을 두었고, 이를 담당했던 관청인 이아(貳衙)가 현재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자리이다.

팔달산 아래 새롭게 축성된 수원 화성. 2018년은 수원 화성이 축성된 지 222년이 되는 해이다.
초대 화성유수로 부임했던 번암 채제공의 초상 시복본

■ ‘수원 화성’의 축성이 28개월 만에 마무리된 이유는?  

1794년부터 시작된 ‘수원 화성’의 축성은 애초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8개월 만에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빠른 공사 속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축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의 방식이 아닌 실학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점이다. 이때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만든 거중기가 ‘수원 화성’의 축성에 큰 기여를 했는데, 이러한 거중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정조가 정약용에게 ‘기기도설’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원 화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급료가 지불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조선의 조세제도는 크게 조(租), 용(庸), 조(調) 제도를 근간으로 했고, 이 중 용(庸)은 국가의 토목공사 등에 백성들이 부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원 화성’의 축성에 급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정조는 급료의 지불을 통해 농번기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경감시켜주었다. 이와 함께 정조는 백성들을 위해 당시로는 귀한 털모자와 솜옷을 하사하고,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위해 호궤 행사를 열어주기도 했다. 한편 ‘화성성역의궤’와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에 남겨진 ‘공사실명판’을 통해 당시 공사 참여했던 백성들의 이름이 역사에 남겨진 점은 인상적이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결합했기에 1796년 10월에 낙성연을 치르며, ‘수원 화성’의 축성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창룡문에 새겨진 ‘공사실명판’. 당시 공사 책임자와 인원이 기록되어 있다.
1796년 10월 낙남헌에서는 수원 화성 축성의 대미를 장식하는 ‘낙성연’이 열렸다.

■ 정조는 왜 ‘수원 화성’을 축성했을까?  

‘수원 화성’ 축성의 가장 큰 명분은 기존 수원부의 읍치에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조성한 것과 이를 대체할 신도시의 역할이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 내 화성행궁을 세우게 되는데, 그 크기가 576칸으로 행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또한 화성행궁을 세운 목적인 현륭원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정조는 즉위한 뒤 13차례에 걸쳐 원행길에 올랐다. 정조의 재위 기간을 고려하면 매년 한 차례 이상 방문했을 정도로 ‘수원 화성’과 현륭원 전배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훗날 정조가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화성행궁에 머무를 계획이 있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화성행궁의 봉수당. 화성행궁의 크기는 576칸으로 행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방어의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면서 “마음껏 구경하라”며 자부심을 드러낸 바 있다.

한편 방어적인 측면에서 ‘수원 화성’의 축성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당장 임진왜란 때만 해도 이 지역은 오산에 자리한 독산성을 제외하면 방어를 위한 성곽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 같은 이유는 대개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적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경우 많았던 역사적 환경에 기인한다. 따라서 한양을 중심에 두고 북쪽의 ‘개성유수부’와 서쪽의 ‘강화유수부’, 동쪽의 ‘광주유수부’와 함께 남쪽의 ‘화성유수부’의 핵심인 ‘수원 화성’을 축성해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목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마지막으로 ‘수원 화성’의 축성을 정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정조는 즉위한 지 1년도 안되어 7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1785년 자신의 친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용영을 설치한데 이어 그 외영을 ‘수원 화성’에 두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수원 화성’에 살던 인구 중 절반 이상이 장용영에 소속된 군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정조와 ‘수원 화성’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정조 이후 수원시의 변천 과정 

1793년 화성유수부로 승격이 된 수원을 진흥시키기 위해 정조는 여러 대책을 강구하는데, 그중 둔전인 ‘대유평(大有坪)’과 ‘만석거’와 ‘축만제’ 등의 저수지를 설치하게 된다. 당시 국영농장인 ‘대유평’을 경영하며 장용영의 자급자족과 토지가 없었던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했는데, 이러한 둔전과 치수시설의 확충을 통해 수원의 농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팔부자 거리에서 알 수 있듯 무이자로 자금을 대출해주고, 상업적인 특혜를 주어가며 전국의 부자와 상인들을 수원으로 옮겨 살게 했던 것도 교통의 요지에 있던 수원을 상업적으로 진흥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만제’, ‘대유평’과 함께 치수 시설이 확대되며 수원의 농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수원 화성 내 시전의 모형도. 전국의 부자와 상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무이자 대출을 비롯한 혜택을 주며 수원의 상업을 진흥하고자 했던 정조
화령전에 모셔진 정조의 초상. 이길범 화백의 표준 영정이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과 함께 수원은 ‘화성유수부’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특혜에 가까웠던 혜택들이 사라지며 점차 그 위상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의 화성시와 오산시와 함께 통폐합이 되어 수원군으로 불리게 된다. 지금도 수원과 화성, 오산이 하나였다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 것 역시 이때의 영향이다. 해방 이후 1949년에 기존의 수원군에서 수원시가 승격을 되며, 따로 분리를 하게 된다. 수원시가 분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남은 지역은 화성군에 귀속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95년까지 용인과 화성의 일부 지역을 편입한 결과 2018년 현재 수원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옛 수원의 모습은 화성시 안녕동에 자리한 ‘수원고읍성’과 융릉과 건릉을 통해 찾을 수가 있으며, 정조에 의해 축성된 ‘수원 화성’은 새로운 신도시이자 현재의 수원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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