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도 넘은 탁상시계를 닦는다. 오랜 시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고장 한 번 나지 않는 시계를 정성들여 닦는다. 세월의 때가 끼긴 했지만 아직은 봐줄 만하다. 첫 아이 돌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 아이 자라서 성인이 되고 결혼하여 자식까지 얻는 동안 세월을 돌리고 돌리며 식탁을 지켰다.

동이 트기 전 어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고 깨워주는 일부터 우리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인이기도 하다. 누구라서 세월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마는 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철없는 시절 가정을 꾸리고 자식 둘 얻어 애면글면 키우고 집 장만하고 땅뙈기 하나씩 장만할 때마다 느낀 기쁨과 눈물이 보인다.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더디 움직이는 초침이 야속했던 일이며 눈만 뜨면 돌아오는 것 같은 할부금과 공과금이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 하루는 24시간이 맞는 것 같은데 문득 돌아보면 한 해의 끝자락에 서있고 그렇게 속절없이 먹은 나이가 싱거워 슬며시 웃어보기도 한다.

지리산 폭우에 쓸려갈 뻔 했던 일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암포 모래사장에 친 텐트에 물이 들어차 쿨렁쿨렁했던 사건까지 때론 무모했고 때론 대책 없었다. 우리 팀이 움직이면 비가 와서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 극성스럽게 여행하고 거칠게 겪어내며 살았다.

투박한 듯 무심한 세월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지나쳤으며 우리는 익어가고 있었는가. 돌아보면 쉽지 세월이었다. 유행하던 노래는 낡아갔고 우리는 세상의 주역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자식들이 차지할 세상을 좀 더 낫게 물려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지금도 더딘 몸짓으로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부모라는 지엄하고 어려운 자리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되돌아 30년 세월을 뒤로 돌려준다 해도 이만큼 살아내기는 힘들 것 같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가슴앓이를 하면서 순간순간 최선으로 삶을 살아냈다. 자식의 자리에서 부모의 자리까지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내 사리사욕만 챙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돌아볼 줄 알고 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살자고 수없이 다짐하고 실천하고자 했지만 그렇게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누군가를 서운하게 할 수도 있고 아프게 했을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상처를 받은 누군가도 있었을 것이고 나또한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말 못하고 끙끙 앓은 적도 많다. 그렇게 삶의 절반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났다.

몸이 느끼는 나이와 마음이 말하는 나이가 달라 가끔은 과욕이 생기기도 하는 나이다. 희끗해지는 머리와 주름들을 삶의 훈장으로 받아들일 준비도 하지만 말만 그렇지 생각이나 행동은 젊은이를 흉내 내고 뭐든 하면 될 것 같은 의욕이 앞서기도 한다. 30년 동안 고장 한 번 나지 않고 시간을 받아낸 시계처럼 나도 시계를 닮아가고 싶은 욕심일까.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 나이에 맞게 행동하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새해 첫 태양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다짐을 구했다. 벌써 올해도 20여일이 지나고 있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 생각하고 살아보자.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가 되어보자.

한인숙(시인)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