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블랙리스트’ 관련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발표한 내용으로 법원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하의 법원행정처가 판사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해 관리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과 관련한 항소심 판결 전후해서 청와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거래를 했다는 참담한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인사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법원행정처가 자신의 고유 권한을 넘어서 판사들의 정치성향을 분류하고 SNS 활동과 댓글 등을 파악해 관리하는 등 마치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공작을 연상시키는 활동을 해왔음이 드러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한 13명의 대법관 전원은 청와대 외부압력설이 불거지자 곧바로 “원세훈 전원합의체 판결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한 것”이라며 이를 부인하는 유감표명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13명 중 원세훈 전원합의체 판결에 참여한 대법관은 7명뿐인 것으로 알려져 대법관들의 주장이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엄정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할 법원이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 심각한 혼란상태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추가조사위에 의해 사찰 정황이 담긴 다수의 문건이 발견됐지만 권한의 한계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핵심 자료는 훨씬 많다는 점에 있다. 의혹의 한 가운데 있는 임종원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컴퓨터는 접근조차 못했고, 자료의 일부는 삭제됐으며, 행정처 판사 컴퓨터 3대에 있던 760여 파일은 비밀번호가 설정돼 있어 열어보지도 못했다.

‘법관은 오직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는 헌법의 원칙이 무너졌을 때 겪어야 할 사회적 대혼란은 불가피하다. 관련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면 삼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헌법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존립근거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관련자인 판사는 사법처리까지 각오해야 한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에 묻혀있는 진실을 밝혀내 법원 적폐의 실체를 확인하고 제대로 된 사법개혁을 통해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단절 없이 미래로 나아가긴 어렵다.

사안이 일파만파 커지자 김명수 대법원장은 24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 결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른 후속 조치’와 이를 담당할 새로운 기구의 조속한 조성을 약속했다. ‘인적 쇄신’, ‘법원행정처 조직 개편’,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발전위원회’를 통한 자체 개혁안의 입장을 발표했지만 현재의 사법부 인적 구조와 분위기를 볼 때 과연 철저한 자정이 가능할지,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에게는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할 법원의 치욕보다는 판사에 대한 사찰과 동향파악, 블랙리스트 작성 등 헌법과 민주주의를 위반한 의혹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관계의 확인이 중요하다. 그동안 두 번에 걸친 법원 자체 조사가 분명히 한계를 드러낸 이상 법적 권한을 갖고 제대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검찰이나 특검, 국회 등 외부기관의 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 관련자들을 모두 철저히 조사해서 위법사항이 드러나면 엄중한 처벌을 해야 한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에서부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법부가 권력에 굴종하면서, 또는 자발적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해왔는지 잘 알고 있다. 국민의 생사여탈권까지 결정해야 할 법원은 그 어느 곳보다 민주적이고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곳이어야 한다.

조백현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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