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보면 처음과 마지막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 가운데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왕조국가의 종말을 맞이했던 경술국치(庚戌國恥)는 그 마지막에 해당이 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삶에 마지막이란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영친왕 역시 ‘마지막 황태자’로 불리며, 우리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영친왕(1897~1970)’의 이름은 이은으로, ‘고종(재위 1863~1907)’과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재위 1907~1910)’과 ‘의친왕(1877~1955)’은 영친왕의 이복형제로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뒤 황제국이 되면서 영친왕으로 봉해졌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왕제도’는 보통 아들이나 직계 자손들에게 부여하던 왕호로 영친왕과 의친왕은 이러한 친왕제도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영친왕을 마지막 황태자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종이 즉위하면서 후사가 없었기에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던 데서 기인한다. 황태자가 된다는 것은 다음 제위를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에 큰 경사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을사늑약(1905)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제에 의해 박탈된 상태였다. 따라서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황태자로 봉해진 영친왕은 자유 의지에 반해 유학을 핑계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영친왕의 후견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통해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영친왕의 신분은 황태자에서 ‘이왕세자(李王世子)’로 격하되었다. 당시 일제는 ‘이왕직’을 설치하고, 왕공족의 신분을 부여해 순종의 경우 ‘이왕(李王)’으로,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 되었다.

배면에서 바라본 영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잠든 곳이다.

영원의 입구에 자리한 재실

■ 시대의 경계인, 무기력한 삶의 연속이던 영친왕

사실상 볼모나 다름이 없었던 영친왕은 일제(=일본)에 의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일본의 군인이 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일본 육군 중장으로 예편을 했다. 어떻게 보면 친일행위나 다름이 없지만, 사실상 볼모 생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제의 허수아비가 된 영친왕은 1920년 일본의 황족인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1901~1989)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던 셈이다. 이방자 여사의 구술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의 정략결혼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과 함께 아이를 못 낳을 체질이라는 이방자 여사를 통해 조선 왕실의 손을 끊자는 속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21년 첫 아들인 이진(李晉)을 낳았으나, 이듬해 조선을 방문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보통 어려서 죽은 경우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예법이지만, 순종의 배려 속에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소재한 숭인원(崇仁園)에 잠들게 된다.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한 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

영원의 제향 공간인 정자각과 비각의 모습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2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나면서, 4월 27일에 ‘이왕세자’였던 영친왕은 ‘이왕’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순종과 달리 조선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야 했다. 이때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비공식적 유럽 여행을 다녀오게 되는데, 당시 영친왕이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잠시라도 일본을 떠나고 싶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1년에 걸친 유럽여행을 떠났지만 돌아올 때 다시 우울감에 빠진 영친왕은 이후 1930년 덕혜옹주의 강제 결혼 과정에서 울분을 표출하기도 했다. 1931년 기다리던 아들인 이구(1931~2005)가 태어났지만, 이후 일본 내의 국수주의의 물결 속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결국 1945년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제의 패망이 확정되었다.

비각 내에 모셔진 영원의 원비. 비석 속 ‘의민황태자’는 사후 대동종약원에서 바친 시호로 공식적인 시호는 아니다.

영원의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의 모습

■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버림받은 영친왕, 그리고 영원(英園)에 잠들다

일제가 패망을 하면서 영친왕은 도리어 외톨이가 되었다.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영친왕과 구 황실의 귀환을 반대했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그동안 인정받던 지위는 사라진 채 어디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당장의 생활이 문제가 될 정도였고, 양쪽에서 버림받은 영친왕은 아들이 있는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후 아들이 있는 하와이를 방문했다가 다시 병세가 재발해 중태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한국으로의 귀환은 의외의 만남에서 풀리기 시작했는데,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이방자 여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박정희 의장은 한국으로의 국적 회복과 귀국에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1963년 11월 22일 귀국해 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병상에 있던 영친왕은 1950년 5월 1일 임종 전 낙선재로 옮겨진 뒤 세상을 떠났다.

능의 배면에서 배치된 석호와 석양의 모습

무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달리 쓸쓸함이 묻어나는 곳이다.

영원의 좌측에 자리한 회인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의 묘다.

영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지금의 홍릉과 유릉 인근에 ‘영원(英園)’이 조성되었다. 묘제의 형태는 조선왕릉의 예에 따라 조성이 되었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재실과 함께 홍살문과 배위, 참도가 자리하고 있으며, 제향 공간인 정자각과 비각이 세워져 있다. 원침은 난간석을 두른 봉분이 가운데 있고,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가 2쌍씩 자리하고 있다.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이 설치가 되었으며, 봉분의 중앙에는 혼유석과 고석, 장명등이 설치되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 석마가 2쌍이 세워져 있다. 1989년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원에 합장이 되었으며, 영원의 바로 옆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인 이구의 '회인원(懷仁園)'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시대의 경계인이었던 영친왕은 무기력한 삶으로 조국의 독립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한동안 그의 귀환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부정적인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이방자 여사의 구술 회고록에는 조약돌과 관련한 일화가 남겨져 있다. 못 보던 조약돌을 본 이방자 여사가 이 조약돌이 뭐냐고 물어보자 영친왕은 고종에게 부탁해 낙선재 뜰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했고, 이 조약돌로 외로움을 달랬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을 위해 ‘한국어 입문서’를 제작할 정도로 오랜 기간 조국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방자 여사의 말처럼 마지막만큼은 조약돌이 있던 낙선재에서 임종을 하고 싶어 했던 영친왕의 삶은 왕족으로서 비겁했지만, 한 인간으로 보자면 안타까운 삶의 궤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