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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의 변신은 무죄
고재현 교수(한림대학교 응용광물리학과) | 승인 2018.03.09 08:10

지난 토요일, 한국에서 미 공군 소속 기상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던 미국의 예술가 댄 플래빈의 전시회 ‘위대한 빛’이 열리고 있던 뮤지엄을 찾았다.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산하 과학문화위원회에서 주관한 미술관 데이트에 동행하기 위해서였다. 플래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조명등 중 하나인 형광등을 오브제로 활용, 독창적인 설치 작품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술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도 다양한 색의 형광등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빛의 공간을 거니는 것은 매우한 독특하고 드문 경험이었다.

오늘날 형광등이 빛을 만드는 방식은 그것이 최초로 발명된 1930년대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형광등 내부에 봉입된 수은과 네온이나 아르곤 등의 비활성 기체에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면 플라즈마가 형성되면서 자외선이 방출된다. 몸에 해롭고 강한 살균력을 지닌 이 단파장 자외선을 그대로 활용하면 살균용 수은등으로 응용할 수 있다. 반면에 형광등의 유리관 내벽에 형광물질을 코팅하면 방출된 자외선이 형광물질에 흡수되어 가시광선으로 바뀐다. 이 형광물질로 인해 조명등의 이름이 형광등이라 명명되었다.

형광등이 내는 다양한 색의 트릭은 바로 형광물질에 있다. 일반 조명용 형광등에는 자외선을 빨강, 녹색, 그리고 파랑으로 변환시켜주는 세 종류의 형광물질이 섞여 있어 백색광이 방출된다. 빛의 삼원색을 섞으면 인간의 눈이 인지하는 대부분의 색을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세 종류의 형광물질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주어 다양한 색채의 형광등을 만들게 된다. 가령 자외선을 받아 녹색과 빨강으로 바꿔주는 두 종류의 형광물질을 섞으면 그 형광등에선 노랑색 빛이 나온다. 형광등의 은은한 빛은 표면의 확산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형광물질 입자들이 고르게 코팅된 표면에서 만들어지는 빛은 사방으로 고른 밝기를 제공하는 소위 람버시안(Lambertian) 확산광의 분포를 형성하고 이것이 형광등의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1973년 작(사진 제공=고재현)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1963년 작(사진 제공=고재현)

플래빈의 공간에서 형광등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ESC 회원들이 들어선 전시 공간에선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으로 배치된 발광체들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어떤 의도를 가진 양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그들은 수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강렬하게 호소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낸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빛과 만나고 빛과 연결이 되어 끝내는 작품의 일부가 된다. 빛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점유해 가며 작품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다양한 색조의 형광등들은 위치와 각도를 바꾸는 우리에게, 그리고 움직이는 우리로 인해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런 경험은 일정한 위치에 서서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미술관의 작품들은 조명의 반사광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조명의 조사 각도와 밝기, 색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객관적인 감상물로 대상화된다. 반면에 플래빈이 만든 빛의 공간은 사람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용의 공간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바라보는 수동적 감상자에서 벗어나 발광체로 다가가 그 빛에 손을 대어 만져도 보고 호흡도 해 보고 빛의 흐름을 따라 걸어보면서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이자 동시에 작품을 이루는 객체가 된다.

환경 유해 물질 중 하나인 수은을 사용하는 형광등은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히 우리 생활에서 사라질 존재다. 발광다이오드에 기반한 새로운 조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들어오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도 이런 작품으로나마 형광등의 존재가 먼 미래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형광등만의 독특한 느낌과 색감, 양 끝단의 흑화된 자국까지 포함한 형광등의 고유한 형상과 빛의 분포가 만들어 낸 공간 속에 푹 잠겨 온 몸으로 빛을 느끼며 감상할 수 있다니! 역시 형광등의 변신은 무죄이다.

고재현 교수(한림대학교 응용광물리학과)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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