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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광해군의 폐위가 가져온 나비효과,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3.09 08:41

역사를 돌이켜보면 종종 예정되지 않았던 의외의 사건들이 뜻하지 않은 변화를 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이 대표적인 예로,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인 인빈 김씨(1555~1613)는 사극에도 자주 나와서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과거 드라마 허준에서 선조의 사랑을 받는 후궁으로 등장했는데, 후계를 두고 자신의 아들인 신성군과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재위 1608~1623)이 경쟁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반면 ‘징비록’에서는 선조에게 조언을 하는 조력자의 모습과 함께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을 그리는 등 극 중에서도 비중이 낮은 인물은 아니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상적이었다면 인빈 김씨와 그의 아들인 정원군(추존 원종, 1580~1619)과 의창군 등은 후궁의 지위와 왕실의 종친으로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인빈 김씨의 순강원의 원침. 묘에서 원으로 변화에 따라 석물이 추가로 가설되었다.

■ 인조반정과 인빈 김씨의 지위 변화

인빈 김씨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광해군일기에 광해군이 인빈 김씨의 은혜를 언급한 부분이 있어 이를 알 수가 있다. 원래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이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 역시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고, 인빈 김씨 자신도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성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에는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수습한 공적을 바탕으로 지위를 다진 광해군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인빈 김씨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아들들은 큰 탈이 없었지만, 1613년 12월 인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원군과 의창군은 견제를 받게 된다. 정원군의 경우 자신의 아들인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자신이 살던 집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있던 집도 빼앗겼다. 의창군(1589~1645)의 경우 1618년 허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왕자의 신분을 삭탈당한 뒤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인 의창군의 신도비
의창군묘의 전경. 의창군과 양천군부인 허씨의 합장묘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인조, 재위 1623~1649)이 가담한 인조반정(1623년)이 성공하며 권력은 하루아침에 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추존 원종)으로 추존하며 정통성을 강화했다. 자연스럽게 정원군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의 지위 역시 높아지게 된다. 1755년(영조31년)에 간행된 ‘순강원상시봉원도감의궤(順康園上諡封園都監儀軌)’는 인빈 김씨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내리고 순강원으로 승격된 사실과 원역의 정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영조는 직접 순강원을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이러한 관심은 묘를 보호하기 위해 수봉관 2인을 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빈 김씨의 신도비각. 능이나 원 등에 신도비가 있는 예는 많지 않다.
인빈 김씨의 신도비 전경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자리하고 있는 인빈 김씨의 순강원은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관람이 제한되고 있는 곳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순강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재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순강원으로 격상이 되면서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순강원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 중 신도비가 있다. 통상 조선왕릉에서 신도비는 세조에 의해 신도비가 세워지는 것이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도비각의 안내문을 보면 1636년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할머니를 위해 신도비를 세웠는데, 이때 비문을 쓴 사람이 바로 의창군이었다. 따라서 신도비에 담긴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문화재다.

■ 순강원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과 인빈 김씨의 원찰인 ‘봉영사(奉永寺)’

신도비각을 지나면 순강원의 원역과 함께 의창군의 묘역이 나타난다. 의창군 묘는 의창군과 양천군부인 허씨의 합장묘로 조성된 묘역의 아래 의창군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크게 가운데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와 상석, 향로석과 함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에 장명등이 설치가 되었으며, 좌우로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동자석 1쌍 등이 세워져 있다. 의창군은 광해군에 의해 유배되었었지만, 인조반정 이후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의 종친으로 일생을 마쳤다.

순강원의 재실. 영조 때 원으로 승격이 되면서 새로 지어졌다.
지금은 사라진 홍살문의 주춧돌에서 바라본 정자각의 모습

의창군 묘를 지나면 인빈 김씨가 잠든 순창원의 원역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왕릉의 조성 예법에 따라 진입공간에는 금천교가 설치되고, 지금은 사라진 홍살문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예전에 있었을 수복방의 흔적은 이제 주춧돌만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제향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면 신도(혹은 향로)와 어도(혹은 어로)가 설치된 참도가 자리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참도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자각이 왼쪽에 있는 계단인 신계와 어계를 만날 수 있다. 제향 공간의 핵심인 정자각과 함께 순강원의 원비가 있는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수복방이 있던 자리.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다.
측면에서 바라본 순강원의 모습

특이한 점은 순강원의 정자각의 기단부가 일반적인 왕릉에 비해 낮다는 점과 정자각과 비각 사이가 너무 좁은 점이다. 이 같은 점은 순강원이 뒤에 승격이 되어 관련 시설물을 추가로 가설했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사초지를 따라 인빈 김씨의 원침으로 올라서면 가운데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와 상석, 향로석과 함께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가 각 1쌍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중앙에 장명등과 함께 좌우로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마 1쌍, 동자석 1쌍 등이 세워져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순강원의 모습
순강원 인근에 자리한 인빈 김씨의 원찰인 봉영사 무량수전

어떻게 보면 인빈 김씨의 순강원은 자손들이 잘 되어 지위에 영향을 미친 경우다. 예법에 목숨까지 걸었던 조선 사회에서 인빈 김씨가 추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아들인 정원군이 왕으로 추존이 되었기에 인빈 김씨는 왕을 낳은 후궁으로 지위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광해군의 폐위가 가져온 나비효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강원은 이처럼 단순한 능묘가 아니다. 어쩌면 이 안에 담긴 역사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생동감 있는 현장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한편 순강원과 함께 인근의 ‘봉영사(奉永寺)’라는 작은 사찰이 있는데, 봉영사는 영조가 이곳을 순강원으로 승격하면서 인빈 김씨의 원찰로 삼았던 곳이다. 따라서 당시 영조가 순강원에 대해 얼마나 예우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함께 둘러보면 좋은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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