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에서 후궁의 지위는 내명부를 관할하는 왕비 이외에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다. 흔히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조선판 신데렐라로 부르는 것도 공노비 출신에서 왕비를 제외한 내명부 품계에서 가장 높은 ‘빈(嬪)’의 위치에 올랐던 이유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현종을 제외하면 예외 없이 후궁을 두었는데, 정실부인에게서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면, 후궁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유아사망률이 높은 시기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영빈 김씨의 영빈묘. 나지막한 산자락에 조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의 경우 후궁들이 세상을 떠나면 ‘묘(墓)’로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후궁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원(圓)’을 칭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이나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후궁들의 묘역 가운데 사적으로 지정된 사례는 많지가 않다. 조선 왕실이 망한 뒤 많은 후궁의 묘가 정치적, 경제적 논리에 의해 서삼릉 내 빈과 귀인의 묘역으로 옮겨지기도 했으며, 남아있는 후궁의 묘 역시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관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면에서 바라본 영빈묘의 전경

그럼에도 구리시 아천동에 자리한 태종의 후궁인 ‘명빈묘(明嬪墓)’와 남양주 진건읍에 위치한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안빈묘(安嬪墓)’, 오늘 소개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의 ‘영빈묘’의 경우 사적으로 지정된 흔치 않은 경우다. 이 세 곳 모두 공통점이라면 비공개지역으로 관람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이다.

■ 숙종 대의 꽃들의 전쟁, 영빈묘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영빈 김씨는 숙종의 후궁으로, 그녀의 본관은 안동 김씨였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노론에 해당했다. 꽤 힘이 있는 가문이었기에 영빈 김씨는 숙종 대 유일한 간택 후궁으로 입궐할 수 있었다. 당시 궁궐 내에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로 대표되는 꽃들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해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표출이 되었다. 이후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자, 이에 숙종이 원자로 삼으려고 하자 서인의 반발 속에 기사환국을 단행해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치세력을 교체했다. 이때 왕비였던 인현왕후 역시 폐출이 되고, 왕비의 자리에 희빈 장씨가 오르는 등 일대의 변화가 있었으며, 영빈 김씨 역시 궁중의 기밀을 누설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다.

영빈묘의 묘비. ‘유명조선국영빈안동김씨지묘(有名朝鮮國寧嬪安東金氏之墓)’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치세력이 변화하고, 왕비였던 희빈 장씨가 빈으로 강등이 된데 비해 폐출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를 하게 된다. 이때 영빈 김씨 역시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702년 숙종에 의해 빈으로 책봉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냉대를 받았는데, 숙종의 다른 후궁에 비하면 인지도나 존재감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영빈묘의 전경

한편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관례대로 출궁해서 사가에서 지내게 되는데, 의외로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과의 사이가 좋았는데,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영빈 김씨의 졸기를 보면 영조가 어릴 때 어머니라 불렀다며, 슬픈 감정을 소회한 뒤 장례는 숙종의 후궁이자 연령군의 어머니인 ‘명빈 박씨’의 예에 따라 할 것을 전교한다. 또한 후손이 없었던 영빈 김씨를 배려해 화유옹주를 봉사손으로 삼기도 했다.

■ 찾아가는 길만큼 베일에 가려진 영빈묘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자리한 영빈묘는 커튼 속에 꼭꼭 가려진 곳과 같다. 우선 찾아가는 길이 그리 쉽지가 않은데, 위치가 문제라기보다 주변이 사유지인 까닭에 도로의 통행에 일부 제약이 있다. 또한 영빈묘의 경우 비공개지역으로 관람이 제한되고 있어, 사전 승인이 없는 경우 개방하지 않고 있으니 이점도 참고하면 좋다.

영빈묘로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초석의 흔적.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다.

초석의 인근에서 볼 수 있는 기와 파편들. 소령원의 예에서 보이듯 묘제를 지내기 위한 ‘제청(祭廳)’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영빈묘를 향해 걸어가다 보면 건물이 있었을 초석이 나열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숙빈 최씨의 소령원에서 볼 수 있듯 묘제를 지내기 위한 ‘제청(祭廳)’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한 영빈묘는 크게 ‘사대석(莎臺石)’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가 자리하고 있다. 묘비에는 ‘유명조선국영빈안동김씨지묘(有名朝鮮國寧嬪安東金氏之墓)’가 새겨져 있으며, 묘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자리하고 있다.

영빈묘에서 바라본 전접읍 장현리의 모습

비공개지역의 특성상 영빈묘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고, 숙종의 많은 후궁들 가운데서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감 역시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영빈 김씨라는 후궁을 통해 숙종 당대의 꽃들의 전쟁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의미를 간직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베일 속에 가려진 영빈묘가 일반에 공개되는 날, 우리는 현장에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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