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연재
조선왕릉 편 - 비운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永懷園)’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3.28 09:18

조선 왕실의 능원 가운데 광명 영회원(이하 영회원)의 위치는 조금 뜬금없는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경우 남편을 따라 합장 내지는 쌍릉으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은 경기도 광명에 자리하고 있고, 남편인 소현세자의 ‘소경원’은 경기도 고양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렇게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전면에서 바라본 영회원의 모습. 곡장과 망주석이 없다.

영회원이 위치한 광명시 노온사동에 가까워지면 ‘애기능’이 적힌 간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려대학교 내에 있던 원빈 홍씨의 ‘인명원’(지금은 원빈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별칭으로 애기능으로 불리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위의 단어를 보면서 영회원 가까이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비공개지역으로 관람이 제한되고 있는 영회원의 입구

영회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아무래도 사유지인 이유로 접근성 자체가 그리 좋지 못한 경우라 영회원이 공개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보통 이러한 능원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편의시설과 관리 인력이 확충되어야 한다. 하지만 영회원의 경우 아직 인근의 사유지가 많기 때문에 문화재청에서도 조금씩 매입을 하고 있어, 그나마 과거에 비해 원소의 형태를 조금씩 갖추어가고 있다.

■ 비운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 영회원이 되기까지

민회빈 강씨(?~1646)는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로, 소현세자(1612~1645)와 가례를 올리며 세자빈이 되었다. 본관은 금천으로, 고려 때 거란족을 물리친 강감찬의 후손이다. 영회원이 있는 곳은 금천 강씨의 묘역으로, 민회빈 강씨는 비운에 세상을 떠난 뒤 친정 묘역에 자리를 하게 된다. 당시 폐서인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초라하게 묘역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으나, 이후 숙종 때 신원이 회복되어 민회빈으로 불리게 되며, 자연스럽게 묘 역시 민회묘로 불리게 된다. 이후 고종 때 영회원으로 높여졌다.

펜스가 쳐진 영회원과 금천 강씨들의 묘역

남편인 소현세자는 차기 왕위에 오를 유력한 후보였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8남매가 태어났는데, 원손인 경선군(1636~1648)이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이었다면 민회빈 강씨는 왕비와 대비로 이어지는 왕실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자호란과 이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은 민회빈 강씨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는 불운의 시작이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볼모로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인조(재위 1623~1649)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재실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가

이후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하지만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이를 대하는 인조의 상식 밖의 행동은 독살설의 빌미를 제공했다. 더욱이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날 경우 원손인 경선군을 세손으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하지만 인조는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며, 왕통을 바꾸는 무리수를 단행했다. 당시 신하들도 이러한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지만 결국 인조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문이 열리고, 산신석에서 바라본 영회원의 모습

이후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 경안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결국 풍토병으로 경선군과 경완군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또한 민회빈 강씨 역시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것과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폐서인의 신분으로 격하되었기에 민회빈 강씨의 묘는 친정의 묘가 있는 현 위치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와는 다른 영회원, 영회원이 말해주는 이야기

과거 영회원의 사진을 보면 원침만 일부 남아있을 뿐, 정자각이나 참도, 홍살문 등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인근이 사유지인 이유로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달리 관리와 복원이 쉽지가 않은 편이다. 그나마 문화재청에서 조금씩 토지를 매입해 과거에 비해 원소의 형태를 조금씩 갖추어가고 있다. 영회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번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가장 먼저 안내문과 표석이 위치한 문을 통과하면 멀리 영회원의 원침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역시 펜스로 둘러져 있는데, 이곳의 문을 통과하면 그제야 영회원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산신석이 자리하고 있다.

상대와 중대의 구분과 문인석과 석마의 모습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의 모습

현재 영회원은 크게 봉분을 중심으로 혼유석과 고석, 장명등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봉분을 보호하는 곡장은 세워지지 않았다. 또한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가 각 1쌍씩 자리하고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과 석마가 각 1쌍씩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 다른 원소와 비교해 망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영회원의 주변을 둘러보면 현재 재실로 추정되고 있는 곳은 민가가 들어서 있고, 좌우로 금천 강씨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정자각과 홍살문, 재실 등에 대한 복원과 관련해 문화재청도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 토지 매입 중이라 복원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금 문화재청의 예산과 인력의 확충이 필요해 보이는 지점이다.

문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사초지와 멀리 고속도로가 한 눈에 조망된다.

조선왕릉에서 ‘원(園)’을 칭하는 곳 중 정자각이 없는 사례는 영회원과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수경원이 있는데, 그나마 수경원의 경우 최초의 자리인 연세대학교에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제로 정자각이 없는 건 영회원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왜 민회빈 강씨는 홀로 광명 땅에 잠들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의 해답 역시 현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회원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2016년 3월 7일 연재를 시작했던 조선왕릉 편의 연재는 금회 영회원을 마지막으로 마감합니다. 그동안 조선왕릉 편의 연재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희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6310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조로 966(조원동)  |  대표전화 : 031)373-8770  |  팩스 : 031)373-8445
등록번호 : 경기, 다01040  |  발행인 : 조백현  |  편집인 : 조백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조백현 대표   |  이메일 : mail@newstower.co.kr
Copyright © 2018 뉴스타워.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