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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너무 앞서간 개혁 시도와 좌절, 정암 조광조의 묘와 심곡서원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4.10 13:29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부 찢어진 부대를 기워서 계속 사용하다 보면 결국 새 술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는 뜻으로, 이는 개혁의 시도와 좌절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자리한 정암 조광조(이하 조광조)의 묘와 심곡서원은 너무 앞서간 개혁과 좌절의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 중종의 시대, 조광조의 개혁과 좌절

조광조(1482~1519)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는 향교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사람인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이 큰데,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조광조의 도학정치의 기반 아래 조선의 성리학은 그 꽃을 피울 수가 있었던 셈이다. 이렇다 보니 조광조는 현실의 어려움을 유교적 관점에 입각해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소격서(昭格署)’ 폐지였다. 소격서는 도교 의식을 행하는 건물로, 유교사회였던 조선과 맞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선례에 따라 보존이 되어왔던 이 건물을 폐지한 것은 유교적 이상향을 실천하기 위한 의지로 표현된다.

배면에서 바라본 조광조의 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손꼽힌다.

이와 함께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에 앞장섰다. 이를 통해 기존의 훈구파와 대비되는 새로운 세력의 구심점을 삼았다. 현량과의 경우 천거를 통해 대책, 즉 왕이 낸 책문에 대한 답을 하는 일종의 면접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한 제도였다. 당연히 기존의 과거제도 하에서 관리를 뽑던 방식과 대비되는 방식이었기에 논란이 많은 제도였다. 결국 현량과의 목표는 훈구파에 맞서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렇게 뽑힌 신진세력들이 훈구파를 공격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조광조의 묘

주지하듯 중종은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반정에 공을 세운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을 했는데, 이들을 ‘정국공신’이라고 부른다. 조광조의 신진세력들은 정국공신에 대한 공격을 했는데, 공이 없는 이들이 뽑혀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위훈 삭제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져 정국공신의 일부에 대해 위훈 삭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훈구파와 신진세력의 대립으로 표면화되었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표. 선조 때 ‘문정공’에 봉해지며 신원이 회복되었다.
조광조의 신도비. 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조광조의 앞서나간 개혁과 언행은 중종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고, 이런 것이 쌓이다 결국 ‘기묘사화(1519)’로 이어져 조광조는 몰락하게 된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중종은 공신 세력에 대한 견제와 힘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조광조를 등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의 정책을 지지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지만, 역설적으로 조광조의 개혁이 중종에 의해 좌절이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 조광조의 묘와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

기묘사화를 통해 조광조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광조에 대한 재평가는 조선 선조 때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훈구파는 몰락하고 신진세력인 ‘사림(士林)’의 세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조광조가 생각했던 도학정치와 개혁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해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조 때 조광조는 신원이 회복되어 영의정으로 추증이 되고 문정공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때 향교에 배향이 되었는데, 그가 유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곡서원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하마비. 이정표 아래 자리하고 있다.
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한 심곡서원의 전경

현재 용인에 자리한 조광조의 묘는 조광조의 선산이 위치한 곳이다. 가족묘로 조성된 이곳에서 조광조의 묘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광조의 아내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로 조성이 되었다. 봉분의 가운데는 묘표가 세워져 있으며, 상석과 향로석이 설치되었다. 또한 묘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자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묘역으로 올라오는 입구에는 조광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어 이 역시 함께 주목해볼 만하다.

교육공간의 핵심은 강당의 모습
제향 공간의 핵심인 사당과 내삼문의 모습

한편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심곡서원은 효종 때 건립이 되어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유지된 47곳 중 하나일 정도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서원의 형태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흔히 향교와 서원은 제향과 교육이라는 목적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향교가 지방의 제사시설 중 하나이자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데 비해 서원은 국내의 유학자 중 특정한 인물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진다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교육적인 목적 역시 향교가 공립학교의 성격이라면, 서원은 사립학교의 성격이었기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향교가 교육보다 제향에만 치우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래된 노거수와 네모 형태의 연지. 심곡서원은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다.

보통의 경우 홍살문 아래 하마비가 세워져 있지만, 심곡서원의 경우 하마비가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데, 그 규모 역시 작은 편이 아니다. 심곡서원에 도착하게 되면 우선 홍살문과 함께 외삼문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문을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강당’과 좌우로 기숙사 격인 동재(거인재)와 서재(유의재)가 자리하고 있다. 강당의 뒤에는 내삼문과 함께 제향 공간의 핵심인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외에 부속건물인 ‘장서각’과 ‘치사제’가 있으나, 현재 치사제의 경우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오래된 보호수와 함께 네모 형태의 연지가 인상적인 심곡서원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사적 제530호로 승격이 되었다. 이처럼 심곡서원과 함께 인근에 소재한 조광조의 묘와 함께 시대를 앞서간 조광조의 개혁과 좌절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도 유효한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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