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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릉에 삽살개의 석상이 세워진 이유는?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4.10 16:26

여말선초의 시대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시대로, 사극의 주요 소재로 활용이 되곤 했다. 보통은 사극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의 사례처럼 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나 정도전의 시각에서 그려졌다. 이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정몽주의 경우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충신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은 허수아비로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양시 원당동에 자리한 공양왕릉의 전경

특히 ‘공양왕(恭讓王)’의 경우는 이름부터가 불명예스러운데, 공손할 공(恭)과 양보할 양(讓)을 써서 공손하게 양위를 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니, 고려 왕조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름이라 할 만 하다. 그렇지만 사극 ‘정도전’에서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공양왕의 모습이 그려지는 등 일부 재평가가 되고 있다. 오늘은 고양에 위치한 공양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공양왕릉과 관련한 지명과 전설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의 멸망과 망국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공양왕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으로 옹립이 되었을 당시는 이성계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의 정치 세력의 변화 역시 기존의 권문세족의 우세에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신진사대부가 장악을 한 상태였기에 흔히 공양왕을 허수아비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공양왕릉의 모습

당시 고려를 두고 신진사대부 내에서 입장이 엇갈렸는데,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등의 온건파들은 고려는 유지하면서 개혁을 구상한 반면, 이성계와 조준, 남은 등의 급진파들은 고려의 간판으로는 힘들고 새로운 이상적인 국가의 수립을 위해 이성계를 왕으로 하는 역성혁명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친우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사이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시대에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세력이 정몽주와 이색 등의 온건파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양왕릉의 뒤쪽에 자리한 묘역들. 공양왕의 외손인 정씨와 신씨의 묘역이다.

하지만 실권은 이미 이성계가 모두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고려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지게 된다. 결국 정해진 수순에 따라 공양왕은 폐위를 피하지 못했고, 이후 원주로 유배를 갔다가 망국 2년 뒤인 1394년 삼척에서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지금도 공양왕릉으로 전해지는 곳이 삼척과 고양 두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공양왕의 비참한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공양왕릉과 관련한 전설과 지명들

고양시 원당동에 자리한 공양왕릉은 공양왕과 왕비 순비 노씨의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공양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삼척과 고양 두 곳이 있는데, 조선 때 공식적으로 인정된 곳은 고양 쪽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데, 1439년(세종 19년)의 기사를 보면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 무덤 인근 암자에 이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공양왕릉의 중앙에 세워진 장명등

이럴 경우 앞선 태조 때의 기록을 통해 공양왕과 두 아들이 삼척에서 피살당했기 때문에 고양 쪽에 왕릉이 있는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여러 견해들이 오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최초 삼척에 공양왕릉이 조성된 뒤 시신을 이장했다고 보는 견해와 식사동 전설을 근거로 공양왕이 고양으로 도망 왔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에 왕릉이 조성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공양왕릉의 우측에 세워진 문인석
공양왕릉의 좌측에 세워진 문인석. 조선 초에 만들어졌으며 고려의 양식을 하고 있다.

‘식사동 전설’은 고양으로 도망쳐온 공양왕을 위해 절의 스님들이 밥을 주었다 해서 ‘식사리’로 불렸다. 이후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호수에 뛰어들어 자결을 했는데, 이때 뛰어든 호수가 지금도 공양왕릉 앞에 남아있다. 당시 청삽살개 한 마리가 호수를 향해 짓다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사람들이 호수의 물을 퍼내니 옥새를 품은 왕과 왕비의 시신이 발견되어 이를 수습한 것이 현 ‘공양왕릉’이라는 것이 요지다.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자결했다고 전해지는 호수

이처럼 공양왕릉으로 인해 ‘왕릉골’의 지명으로 불리게 되고, 공양왕이 있는 곳을 알린 이 삽살개를 기려 왕릉 앞에 석물로 세운 것이다. 공양왕릉은 쌍분을 중심으로 각각 봉분 앞에 비석이 세워졌는데, ‘고려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 장명등과 함께 좌우에 문인석 2쌍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형태는 고려의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공양왕의 시신을 찾았던 삽살개. 이 석물을 두고 삽살개로 보기도 하고, 석호 혹은 석사자로 보기도 한다.

풍수적으로 볼 때 공양왕릉의 자리는 명당으로 평가되는데, 안타깝게도 공양왕릉의 뒤로 공양왕의 외손인 정씨와 신씨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의 경우 왕릉이 조성되면 인근의 민가나 관청은 옮겨야 했지만, 이미 고려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관리되지 못했던 공양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의 멸망과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양왕릉은 충분히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인근의 최영 장군 묘와 용인에 조성된 정몽주 묘와 함께 둘러보면 좋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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