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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원균 장군을 재평가한다고?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4.22 19:44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때 원균 장군(이하 원균, 1540~1597)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흐름에서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의 와해와 2만 군사를 수장시켰던 무능력했던 군인으로 평가된다. 이런 그의 묘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 ‘원릉군 기념관’이 개관했다. 참고로 원릉군은 원균의 사후에 추봉된 관작이다.

지난 4월 16일에 열린 개관식에서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의 회장은 ‘선조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며 자축을 했다. 이와 관련해 대종회 관계자를 비롯해 평택 인사 및 언론 등도 한목소리로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논하며, 기념관을 통해 원균의 인식을 개선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과연 원균이 재평가를 할 만한 인물인가?

■ 원균을 재해석하겠다는 원주원씨대종회와 평택시의 무모한 발상

원균에 대한 재해석에 불을 붙인 ‘원릉군 기념관’의 개관은 무모한 발상이자, 평택의 이름을 스스로 깎아 내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와 관련해 평택의 지역신문과 인터뷰를 했던 종친회 측 인사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크게 ▲<난중일기>와 <징비록> 등을 통해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 ▲선조에 의해 선무 1등공신(권율, 이순신, 원균)에 책봉된 것이 원균의 공을 인정하는 것 ▲칠천량해전과 관련해 <징비록>의 기록과 달리 상소문을 올리고, 전투 전략을 보고하는 등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며 변호하고 있으며, 패전의 원인을 선조와 조선 조정이 원균을 몰아붙인 것이라 항변한다.

문인석에서 바라본 내리저수지의 모습

우선 원균에 대한 기록은 국가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야사 격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와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만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소리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대차게 원균에 대한 비난과 이순신에 대한 공을 기록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1년(1598년 11월 27일)

게다가 선무 1등공신의 책봉 역시 문제가 있었는데, 애초에 원균에 대한 공신 책봉은 2등으로 녹공이 되었다. 하지만 선조(재위 1567~1608)는 이를 뒤집고 권율과 이순신과 함께 1등으로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선조는 패전할 줄 알면서, 비변사의 독촉으로 패배한 것이라 그 용기와 지혜가 가상하다며 1등으로 올릴 것을 주장한데 이어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자 다른 공신들을 다 삭제하더라도 이순신과 권율, 원균 만큼은 1등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따라서 선무 1등공신의 책봉은 원균의 공이 뛰어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선조가 원균을 우격다짐으로 끼워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데, 선조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선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다.

배면에서 바라본 원균의 묘

한때 선조는 출전의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이어 한양으로 압송했다. 그나마 정탁의 ‘신구차(伸救箚)’를 비롯한 그간의 공을 이유로 목숨만은 살려줬지만,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보지 못한 채 백의종군 길에 나서야 했다.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한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예스맨을 원했지만, 정작 현장과 군사적 특성을 무시한 채 원균 같은 인사를 통제사로 임명했으니 조선 수군이 제대로 운영이 될 리 만무했다. 또한 원균 역시 상소를 통해 이순신을 비난하고, 선조가 듣고 싶어 한 말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질투심이든 허영심이든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칠천량해전의 패배와 조선의 위기, 그리고 명량해전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부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았다. 무능력한 그가 봐도 수륙 합동이 없이 수군 홀로 부산으로 진격하는 건 미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원균이 조정에 수륙 합동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계속 장계를 보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정의 변화는 없었고, 출병을 차일피일 미루자 도원수인 권율이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는 웃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현장. 이 전투를 통해 조선 수군이 와해되고, 2만 명이 수장되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사진=이경렬)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에게 해군 사령관이 곤장을 맞은 셈이니, 수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원균은 이러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채 출병했고, 결국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되는 참사를 맞이했다. 그나마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 12척의 함대를 가지고 탈출했는데, 훗날 조선을 구했던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 역시 전사하게 되는데,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았다면 극형에 처해졌을 사항이었다. 이후 선조의 행동을 보면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원균과 하늘의 탓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본인도 조금 찔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붕괴된 조선 수군의 재건과 왜군의 수군을 막을 책임자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기복수직교서’를 내렸다.

칠천량 해전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 된 이순신.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위치한 손경례의 집에서 기복수직교서를 받았다.

이때 선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이순신에게 조선을 구해달라는 사정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왕이 신하에게 행한 최초의 사과로 기록되었다. 한편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배설이 남긴 12척의 함대를 인수하는 한편 진주에서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재건을 이루며, 13척의 함대로 왜군의 함대를 막아내는 기적적인 명량해전의 승전을 이루게 된다.

■ 원균에 대한 재평가가 아닌,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원균의 행적

물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분명 가혹한 책임이다. 이러한 원인에는 선조와 조선 조정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순신의 파직에 원균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애초에 그릇이 안 되는 인사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화를 자초한 셈이다. 어쩌면 원균 자신의 능력보다 큰 자리에 앉았던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 때문에 원균의 이름이 회자될수록 그에 반비례해 비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재평가라는 이름으로 ‘원릉군 기념관’을 세운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념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자신의 수군과 함대, 백성을 위해 선조와 맞서면서까지 지키고, 이기고자 했던 모습과 비교한다면 원균의 경우 제 한 몸을 위한 이기적인 모습 이외에 다른 면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이순신과 원균의 결정적인 차이로, 지금도 우리가 이순신을 성웅으로 추앙하는데 비해 원균에 대해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원균의 유품을 싣고 온 말을 묻은 애마총

현재 원균의 묘에는 ‘애마총’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균이 타던 말의 묘로 이곳에 담긴 사연이 제법 들어볼만하다. 이야기는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원균의 유품을 실은 말이 이곳까지 왔다고 했는데, 이에 후손들이 원균의 묘를 만들고 그 아래 애마총을 조성했다는 것이 요지다. 즉 이곳에 있는 묘는 원균의 시신이 없는 가묘인 셈이다. 진짜 묘는 확인된 적이 없지만, 통영에 위치한 ‘엉규이묘’로 전해지는 무덤을 원균의 묘로 보기도 한다.

원균의 묘 위쪽에 자리한 사당, 원균에 대한 재평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재평가인가?

‘원릉군 기념관’을 통해 ‘바른 역사를 배우고, 원균의 진면목을 알아 달라’는 대종회의 입장이 과연 일반인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 이미 원균에 대한 행적은 논란이 없을 정도로 최악의 평가를 달리고 있으며, 공식 기록을 비롯해 야사와 문집 등 다양한 기록을 통해 확인 검증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원균으로 인해 조선 수군이 와해되고, 망국의 위기와 함께 2만 조선 수군을 수장시킨 그의 이력을 재평가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이러한 원균에 대한 재평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재평가인가?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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