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1896~1948)은 도쿄미술학교 출신 서양화가로 당대 ‘구미만유(歐美漫遊)’를 경험했던 신여성이다.

4월 28일 나혜석 탄생일을 기념하여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바로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민음사출판)이다. 나혜석의 글은 모두 여성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 고통과 불합리함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정직하고 진실되며 통찰력 가득하다.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서울 진명여고를 최우등 졸업,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들어가고 이미 18살에 논평과 소설까지 썼던 나혜석.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20년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우등 1등 졸업사건, M과의 연애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사건, K와 연애사건, 결혼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사건, 황옥사건, 구미만유사건, 이혼사건, 이혼고백서 발표사건, 고소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마흔 두 살 불꽃처럼 살았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고 할 수 있는 나혜석은 불평등한 조선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고발하는 글을 다수 썼다. 나혜석은 1930년 5월 ‘삼천리’의 설문에 ‘장차 여성 운동에 나서려 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여권 운동자의 시조’라는 깬 의식이 뚜렷했다. 근대 여성 활동가로 자취를 남겼건만 가부장제의 굳은 인습에 맞서다가 날개가 꺾였고,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인물이다.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 이 책에는 나혜석이 쓴 소설, 편지, 감상문, 비평, 기고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다음은 나혜석의 생각을 담은 문장들이다.

“조선 남성 심사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p.149)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은 임의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p.210)

이렇게 부조리와 억압을 비판하며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스스로 자기 삶을 글로 써서 발표하며 생애를 글로 남겼다. 남편이 된 김우영과의 결혼 조건도 매우 파격적이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별거케 해 주시오.” (p.94)

남편 역시 상처한 후 자식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결혼하여 남편과 세계여행을 하고, 파리에서 그림 공부도 한 적 있다. 그림에 대한 공부뿐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부간에 어떻게 화합하면 살까’ ‘서구 여성의 지위와 참정권은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등에 관하여 자기의 언어로 정립했다.

과도기에 선각자로 살았던 나혜석은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금기에 도전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다. 네 자녀를 낳았지만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p.229) 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하며 모성의 본능이 아닌 경험을 최초로 글로 써냈다. 여성이 직접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당시 남성에게 못마땅한 일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고민하고 방황했던 나혜석은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원조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글은 여자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살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한편, 수원아이파크미술관에 나혜석 홀을 마련했고, 나혜석의 유족이 그림 몇 점을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의 후손들은 자신의 어머니 나혜석을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다. 자식과 남편을 버린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페미니스트의 평가처럼 용기 있는 여성운동가의 원조라고 인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로서의 명성만을 인정할까.

매년 수원 행궁동에서는 나혜석 생가터 언저리에서 나혜석 기념 예술제를 시민들이 열어서 진행한다. 작고 소박한 나혜석 기념 축제는 마을의 행사로만 생각된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잔뜩 붙어 있는 나혜석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기념행사다. 과연 나혜석이 남성이었다면, 후대에도 이토록 낮게 평가되었을까?

1931년 삼천리에 기고한 나혜석의 글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정말 자기가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곧 자기를 잊지 않은 것이 된다.” (p.196)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잊지 않으려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던 몸부림! 나혜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김소라 기자  sora77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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