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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상징인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서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5.09 08:53

역사를 돌아보면 한 인물의 삶의 궤적이 지금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망국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해낸 충무공 이순신을 들 수 있다. 지금도 매년 4월 28일이면 충무공의 탄신일을 기리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충무공과 관련한 유적지가 산재해 있으며, 지금도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언급이 될 정도다.

경기도 광주시에서 바라본 다산유적지의 모습

이는 한 인물이 역사의 평가와 함께 지금도 그 영향을 끼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학’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 이름, 실학의 시대를 상징하는 다산 정약용(=이하 정약용)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약용은 우리 사회에 언급이 되고 있고,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천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정약용, 실학의 시대에 상징이 되다.

시대를 통틀어 천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있다. 서양의 경우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선의 경우 세종대왕이 대표적인 예인데, 정약용 역시 이러한 천재의 반열에 오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그의 학문적인 경지에서 찾을 수 있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를 지침서로 남겨 지금도 여전히 공직자들에게 표상이 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를 지침서로 애민정신과 민본주의의 관점에서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또한 형법서인 <흠흠신서>를 남겨 나름 과학적인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은 기여를 했다. 이른바 조선판 CIS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이 밖에 행정기구의 개편과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했던 <경세유표>를 남기기도 했으며, 수원 화성 축성에 참여하는 등 가히 정약용의 활동을 보면 천재라는 설명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천진암 성지. 정약용이 지은 <여유당실기>에는 이곳에서 천주교와 관련한 강학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상징이 되었고, 현재 실학 혹은 철학의 관점에서도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설 <흑산>에서도 볼 수 있듯 정약용의 집안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과 박해의 역사에 있어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당장 정약용이 지은 <여유당실기>를 통해 천진암에서 천주교와 관련한 강학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천진암’은 경기도 광주시에 자리한 작은 암자로, 사찰에서 천주교가 시작이 된 점은 이색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산사건(1791)이 벌어지면서 정약용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

■ 진산사건이 불러온 정약용 형제의 비극,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정약용

'진산사건'이란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곧 조정에 전해 당시 노론과 남인으로 구성된 조정에서 천주교에 우호적이던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의 구실을 주었다. 당시 정약용이 유배를 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때 정약용을 비롯한 3형제의 운명이 달라졌다. 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의 운명을 택했던 정약종과 이와는 반대로 배교를 선택했던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진산사건의 파장이 있었던 전주 전동성당. 천주교를 둘러싼 노론과 남인의 대립 격화와 이로 인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운명은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진산사건’의 영향은 곧 ‘신유박해’라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몰고 오게 되고, 이후 근 백 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시초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이야 천주교가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의 상황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동에 대해 금지를 했던 것이 결국 이 같은 파국을 불러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유배에서 풀린 정약용은 남양주로 돌아오게 되고, 저술 활동을 하면서 생을 살다가 이후 그가 살던 ‘여유당’의 뒤에 묘를 조성하게 되는 이것이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정약용의 묘가 다산유적지에 자리하게 된 배경이다.

정약용이 살던 여유당. 한때 홍수로 유실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복원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정약용의 흔적을 간직한 다산유적지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5-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둥근 형태로 돌출된 채 형태로, 남한강과 마주하고 있는데, 정약용의 또 다른 호인 ‘열수(洌水)’가 바로 한강을 말하고 있다. 현재 다산유적지에는 정약용이 살던 여유당과 정약용의 묘, 사당 및 기념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약용의 묘. 실학의 상징이자 조선 후기를 대표했던 실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의 삶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지난 1920년대 이 지역에 대대적인 홍수로 여유당이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으며, 당시 종가에서 필사적으로 정약용의 저서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다산유적지의 맞은편에 실학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실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의 묘 인근에 실학박물관이 자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정약용을 떠올리면 유배지였던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이 잘 알려져 있는데, 다산유적지와 함께 보면 좋은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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