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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곤지암’과 신립 장군의 묘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5.15 13:47

지방자치단체 중 ‘광주시’가 두 곳이 있는데, 경기도 ‘광주시(廣州市)’와 전라도에 있는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가 그곳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광주시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전라도에 있는 광주광역시를 이야기한다. 이는 곧 다가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해 광주가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 1번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광주시 = 광주광역시’로 인식이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비교적 근래의 일로, 예전의 경기도 광주시는 오랜 역사와 함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했다.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한 ‘풍납동토성’. 지금은 행정구역 상 서울이지만 과거에는 광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초기 백제의 활동 무대인 곳이다.

지금은 상상이 안가지만 과거 광주의 관할 지역은 현재 서울의 강남 지역까지 포괄했던 지역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초기 백제의 활동 무대였던 곳이자, 동시에 한강유역을 두고 쟁탈을 벌인 삼국시대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의 부침 속에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지며, 경덕왕 때 ‘한주’로 불리었다. 현재의 명칭인 광주가 자리매김한 것은 고려 때로 이때 광주목이 되면서 광주는 역사에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조선 때는 광주유수부로 승격이 되었으며, 관내에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항쟁의 무대가 되었던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 곤지바위에서 유래된 곤지암의 지명 유래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경기도 광주시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곤지암’에 대해서는 안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최근 개봉한 영화 ‘곤지암’의 흥행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곤지암 ‘남양신경정신병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곤지암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곤지암이 실제 지명인 까닭에 영화 속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오히려 왜곡된 정보를 접하게 될까 우려되는 부분 역시 없지 않다.

곤지암의 지명 유래가 된 곤지바위의 전경

곤지암은 현재 곤지암초등학교 옆에 자리한 ‘곤지바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곤지바위는 총 두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바위에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명을 비롯해 주변의 학교나 간판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곤지암은 안내문을 통해 인근에 자리한 신립 장군의 묘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곤지바위는 고양이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신립 장군의 묘가 인근에 생기면서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말을 타고 곤지바위를 지나면 말발굽이 땅에 붙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말을 타고 길을 지나던 선비가 ‘장군의 원통함이 행인의 불편함을 초래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자, 그 순간 벼락이 바위를 쳐서 현재의 모습처럼 두 쪽으로 갈려졌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다.

안내문이나 기타 자료에 등장한 곤지바위는 본래 하나였지만, 벼락을 통해 바위가 두 개로 갈라졌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또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는 시신을 찾지 못해 가묘로 조성한 자리가 ‘쥐혈’이라 곤지암에 있는 고양이 바위 때문에 묘를 쓰기에 좋지 않았다. 그러자 그날 밤 벼락이 쳐서 고양이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앞선 안내문과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야기들은 구전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전략상의 실책과 탄금대에서 순절한 신립 장군의 묘

이처럼 곤지암에 전해지는 신립 장군의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했던 그의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신립 장군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의 후손으로, 당시 조선에서 명망이 있던 무장이었다. 당시 신립이 이끄는 기마부대는 조선의 최강이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이런 그의 명성을 높여준 것이 바로 니탕개의 난(1583)이었다.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필승 카드로 여겨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해 왜군을 막게 했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위치한 신립 장군의 묘

하지만 방어 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를 선택해 배수의 진을 친 것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당시 왜군의 주력 무기가 조총이었던 점과 전투가 있었던 현장이 주력 부대였던 기병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불리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싸워 포기하지 않았던 신립 장군의 순절은 왜군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남기며, 한양으로의 진격을 지체하게 했다는 점은 평가할만하다. 현재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자리하고 있는 신립 장군의 묘는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석이 1쌍이 자리하고 있으며, 총 5기의 묘 가운데 3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문경새재의 이진터. 문경새재의 2관문과 3관문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신립 장군이 이곳에 허수아비를 세워 왜군을 속이려 했던 곳이다. 이 속임수는 까마귀가 허수아비에 앉는 것을 보고 실패로 끝나게 된다.

결국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군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가장 문제는 왜군에 대한 정보가 부재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혼선이었다. 이같은 정보의 부재는 불리한 전장의 환경을 조성했고, 결국 도읍인 한양이 불과 보름 만에 함락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빠른 진격 속도에 명나라가 조선이 왜군과 한 통속이 되어 명나라를 침입하려 한다는 오해까지 불러일으켰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의 신화를 일구었던 이순신 장군의 경우 적정을 살피고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과는 비교가 되는 대목으로, 지금도 전장에서 소리 없는 총성이 오가는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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