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왕의 초상화를 일컬어 ‘어진’이라 말하는데, 어진의 대표격이라고 하면 단연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을 들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의 어진은 여러 개가 그려졌지만, 긴 시간 동안 전쟁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금은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 있으니, 이 역시도 우리 역사의 굴곡진 흔적이라고 할만하다. 보통 궁궐 내에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진전(眞殿, 혹은 영전)’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창덕궁 선원전이 대표적인 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의 어진

경주에 위치한 ‘집경전구기비’.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집경전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어진이 궁궐 밖에 세워진 사례가 많지 않은데, 태조의 경우 조선 왕실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전주 경기전을 비롯해, 개성 목청전, 영흥 준원전, 경주 집경전 등의 진전을 세워 봉안했다. 반면 태조의 사례를 제외하면 왕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 지방에 세워진 경우는 수원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성행궁과 함께 볼 수 있는 화령전이 그것이다. 화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으로, 정조와 수원 화성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 화령전

1795년 원행길에 나선 정조의 행렬을 그린 <화성행행도>를 보면 당시만 해도 화령전은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 정조의 아들인 순조 때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화성행궁을 통해 내부 관람이 가능하지만 본래 화령전은 화성행궁과는 독립된 별도의 전각이다. 오히려 건축물의 격을 보자면 화성행궁 보다 화령전이 더 큰 위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화령전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을 마주하게 된다.

화령전의 외삼문 앞에 자리한 하마비. 화령전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의 전경. 사진상 우측에 복도각과 함께 이안청이 자리하고 있다.

운한각에 봉안된 정조의 표준영정. 이길범 화백의 작품으로 실제 정조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종전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본래 운한각 내부에 정조의 어진이 봉안되었는데, 지금은 이길범 화백의 표준영정이 대체하고 있다. 본래 이곳에 있던 정조의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종전 이후인 1954년 12월,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어진이 보관되어 있던 창고가 불타면서 사라지게 된다. 이때 정조의 어진을 비롯해 많은 어진이 불에 타 사라졌는데, 철종의 어진은 얼굴 부분이 무사해 복원이 가능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의 어진과 영조의 어진, 철종의 어진을 제외하면, 최근에 모사본이 확인된 세조의 어진만이 남아있다.

■ 일제강점기에 ‘자혜의원’이 들어선 화령전과 수원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 ‘정조’

운한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복도각’과 함께 ‘이안청’이 자리하고 있는데, 평소 운한각에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가 공사 혹은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복도각을 통해 이안청으로 어진을 옮겨 임시로 보관했다. 또한 우측의 협문을 들어서면, 정조의 제향을 준비하던 관리들의 업무공간인 전사청과 뒤로 제향 때 쓴 우물인 ‘제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운한각을 중심으로 좌측 협문에는 화령전의 재실 격인 풍화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제관들이 대기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운한각을 중심으로 좌측 협문을 지나면 볼 수 있는 전사청

전사청의 뒤에 자리한 제정. 제향 때 쓴 우물이다.

운한각을 중심으로 우측 협문을 지나면 볼 수 있는 풍화당

이처럼 화령전은 조선왕조가 유지될 때까지 관리가 되고, 중요하게 인식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을 상징했던 궁궐이나 건축물 등은 훼손을 피하지 못했는데, 화령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운한각에 봉안된 정조의 어진은 한양으로 옮겨지고, 텅 빈 채 방치된 화령전은 ‘자혜의원’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전사청과 풍화당은 병실로 이용되었다. 또한 여류 화가 나혜석의 작품인 <화령전 작약>에는 화령전 앞뜰에 작약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같은 화령전의 변화는 조선이 망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수원시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정조가 차지하는 위상은 가히 압도적인데, 화령전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문화재이자 왕의 어진을 봉안한 건물인 ‘진전’의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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