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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에 자리한 ‘경순왕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10.16 09:37

대부분 신라 하면 떠오르는 곳은 경주다. 그도 그럴 것이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도로서 기능을 했던 경주는 도시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때문에 경주 곳곳에는 옛 신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러한 신라의 흔적을 간직한 곳 중 경기도 연천을 빼놓을 수 없다. 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위치가 참 묘하다.

연천에 자리한 경순왕릉의 전경

현재 경순왕릉은 민통선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구글 지도를 보면 휴전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예전에는 경순왕릉을 방문하는 것도 허가가 필요한 사항이었지만, 지금은 제한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상시 개방으로 열려 있다. 흔히 우리는 처음과 끝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는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경기도 연천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에 오늘은 경순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의미 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이 연천에 자리한 까닭은?

예전 인기리에 방영된 <태조 왕건>의 시대는 후삼국과 고려의 통일을 다루었던 시기로, 고려와 후백제의 견제 속에 신라는 주연이 아닌 조연의 역할에 머물게 된다. 이 시기 신라의 세력은 급속히 와해가 되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후백제 견훤에 의한 경애왕의 피살이었다. 이후 신라의 영향력은 경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종국에는 후백제나 고려의 승자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된 경순왕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도 많지가 않았다. 그리고 불완전한 상황은 후백제의 내부에서 후계자 문제로 변란이 일어나며 그 끝을 향해 가게 된다.

경순왕의 초상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고려로 귀부하며, 신라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경순왕. 지금은 고랑포에 잠들어 있다.

견훤의 장남인 신검이 일으킨 반란으로, 견훤은 금산사로 유폐되었다가 이후 탈출해 고려로 귀부하기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들어 바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물론 모든 이가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닌데,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처럼 고려로의 귀부에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를 막지 못했고, 결국 경순왕의 항복으로 신라는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경순왕이 귀부한 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하게 하고,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했다. 또한 경주를 식읍으로 삼게 할 만큼 우대하게 된다. 이후 고려와 신라 왕실 간 혈연관계가 맺어지고, 고려에서 신라계의 입지가 강화되기도 했다.

■ 경주를 벗어난 경순왕릉, 적막함과 고요함이 자리한 곳

경순왕이 세상을 떠난 뒤 경순왕릉은 연천의 고랑포에 조성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최초 경순왕의 시신은 장지인 경주로 향했지만, 고려에서 왕의 시신은 백 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구실을 붙여 결국 고랑포에 장지를 조성하게 된다. 이같은 이유에 대해 신라 부흥과 같은 복벽 운동에 대한 차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분명 고려 초에 경순왕릉이 조성되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후 실전이 되었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영조 때 경순왕릉의 지석과 신도비가 발견된 사실을 고하고 있다. 이후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해방 이후인 1973년 다시 재발견이 되는 등 경순왕릉 자체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경순왕의 묘표. 지금도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경순왕릉으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지뢰 조심’. 장소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경순왕릉의 신도비로 전하는 비석. 마멸이 심해 1~2글자를 제외하면 알아보기 어렵다.

경순왕릉의 외형을 보면 마치 조선시대의 능묘를 보는 듯한데, 이는 영조 때 경순왕릉이 발견되어 석물과 곡장 등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형이 가지는 의미 역시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치가 민통선 내에 있다 보니 한국전쟁 당시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신라경순왕지묘(新羅敬順王之陵)’라 새겨진 묘표에는 총탄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와 함께 경순왕릉으로 진입하는 공간에는 지금도 ‘지뢰 조심’ 안내문을 볼 수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좌측에 자리한 석양과 망주석
경순왕릉의 장명등.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영조 때 재발견이 되어 수축한 결과 조선시대의 묘제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경순왕릉의 전경

현재 경순왕릉은 재실과 함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석, 경순왕릉의 능침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신도비의 경우 마멸이 심해 1~2글자를 제외하면 알아보기가 어렵다. 또한 능침은 크게 호석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표와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이와 함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을 두르고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경순왕릉의 외형은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데, 장소적인 측면과 왕릉의 외형이 주는 의미 등 우리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흔적은 결코 작지가 않다. 따라서 경순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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