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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시작된 한국 천주교, 양자산 자락에 자리한 ‘천진암’과 ‘주어사’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10.30 01:13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 역사를 돌이켜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다른 나라와 달리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 서양의 선교사가 파견이 되고,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주학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신앙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최초 조선의 선비들이 모여 천주학을 공부했던 공간은 곧 천주교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찰에서 시작된 한국 천주교의 시작, 천진암 성지

■ 조선의 선비들이 사찰에서 강학을 한 이유는?

당시 이들이 모였던 공간은 지금으로 치면 산속에 있는 사찰로, 경기도 광주시와 여주시의 경계에 있는 양자산(=앵자산) 자락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실학자로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이 남긴 <여유당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당시 천진암과 주어사 등에서 강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 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 하였는데... <중략>

- <여유당전서> 녹암권철신묘지명 중

또한 조선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 역시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이벽의 강학에서 찾을 만큼 천진암과 주어사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 있어 상징성이 있는 장소다. 그런데 이벽이나 권철신 등은 왜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천진암과 주어사 등의 사찰에서 강학을 해야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서학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쇠락해버린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선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일부 왕실과 관련한 사찰이나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쇠락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에 사찰은 종종 선비들이 쉬어가는 장소로 활용이 되곤 했는데, 이옥이 쓴 <중흥유기>를 보면 당시 이옥을 비롯한 일행이 북한산을 유람했다. 이때 이들이 숙식 한 장소를 보면, ‘태고사’와 ‘진국사’로 나오고 있어, 조선 선비들이 사찰에서 휴양을 하거나 쉬는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진암 터에 세워진 표석
전주 전동성당. 진산사건의 파장으로 이후 백 년간 박해의 시대가 시작된다.

한편 이 시기 조선 조정과 관리들 사이에서 서학이 어떻게 인식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정조 때 발생한 ‘진산사건(1791)’은 이후 신유박해라는 후폭풍을 몰고 왔다. 신유박해 이후로도 백 년에 걸친 피바람이 계속될 만큼 서학에 대한 인식은 왕실과 관리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진산사건과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사간 신기가 상소를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저 권(權)·윤(尹) 양적(兩賊)은 유자라는 이름을 지니고 또 내력도 있는 집안입니다. 설사 그들이 요망한 학술을 주장하고 유학을 배반하기만 하였더라도 사실 천만 가증스러울 일인데, 신주를 멋대로 태워 버리고 부모의 시신을 팽개쳐 버렸으니 이는 실로 강상(綱常)의 죄인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한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라며 천주학을 엄금할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선 사회의 분위기에서 서학을 공개리에 강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의 선비들이 사찰에서 강학한 사실은 새삼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 한국 천주교의 성지 이면에 불교의 사찰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나름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간직한 천진암과 주어사는 양자산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광주시 퇴촌면에 소재한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에서 성역화 사업을 진행, 지금은 성지로 운영 중에 있다. 또한 여주시 산북면에 자리한 주어사의 경우 여주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폐사된 자리에는 축대와 주춧돌 등의 형태만 간신히 남기고 있다.

천진암 성지에 소재한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의 묘

한편 천진암 성지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비석>을 비롯해, 옛 천진암이 있는 자리에 <천진암 강학회 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강학터를 지나면 이벽을 비롯해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등 5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당시 천진암에 모인 조선 선비들이 세수를 하던 샘물로 알려진 ‘빙천수’가 지금도 흐르고 있어 천진암에 남은 흔적은 나름 상징성이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빙천수. 나름의 상징성을 간직한 천진암 성지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천진암과 주어사가 천주교의 성지 이전에 불교 사찰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블뤼 안 주교가 인식했듯 당시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발전했던 것은 맞지만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산속 깊은 곳의 사찰로 숨어들어 서학을 공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인 만큼 이들 장소에 대한 중요성은 인정되지만 이 과정에서 불교계와 마찰을 빚은 사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성지라는 것에 너무 집착해 천진암과 주어사가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설적으로 사찰에서 천주교가 시작했던 사례라는 점에서 오히려 종교 간의 화합의 장소로 활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천진암과 주어사가 천주교만의 성지가 아닌 종교 간 화합의 장소로 더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생각해볼 과제가 될 것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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