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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과 화성, 오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12.04 07:48

흔히 역사를 나누는 분기점을 이야기할 때 문자로 된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현 수원과 화성, 오산 지역의 역사는 마한의 소국에서 시작해 이후 백제와 고구려, 신라 순으로 차례로 지배 세력이 교체된 것을 알 수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현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는 마한 54개국이 존재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백제였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는 초기 마한의 소국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수원 광교산에서 바라본 수원의 모습. 백제와 관련한 <수원군읍지>의 내용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다. 여기에는 온조왕의 딸과 사위인 ‘우성위(禹成尉)’가 광교산에 거처를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더욱 놀라운 건 온조왕이 딸과 사위를 보기 위해 가끔씩 광교산을 찾았다는 내용과 온조가 머문 행궁과 우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성위보(禹性尉湺)’, ‘우성위평(禹成尉坪)’, ‘우평(禹坪)’ 등의 지명이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원군읍지>의 내용은 교차 검증할 사료나 문화재 등이 없는 데다 전승의 관점이 크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수원군읍지>의 기록을 무심히 넘기기 힘든 건 수원에서 멀지 않은 화성시에 분포하고 있는 백제 유적들 때문이다.

■ 한성백제 시기에 축성된 길성리토성과 마하리 고분군

흔히 백제의 역사를 구분할 때 도읍을 기준으로 ‘한성백제’와 ‘웅진백제’, ‘사비백제’로 구분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화성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백제의 유물은 한성백제 시기의 것으로, 이 가운데 핵심이 되는 유적이 바로 길성리토성이다. 국가사적급의 평가를 받는 길성리토성은 화성시 향남읍 길성리와 요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성곽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축성 방식에 있는데, ‘판축 기법’을 활용한 백제의 성곽이었다는 점이다. 해당 성곽과 유사한 성곽이 바로 하남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는 풍납동토성과 인근에 위치한 몽촌토성 등 백제의 중앙에서 확인되고 있다.

화성시 향납읍 길성리와 요리에 소재한 길성리토성
백제의 중앙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이 확인된 마하리 고분군 (사진제공=류순자)

발굴조사를 통해 성곽은 둘레가 2311m로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출토 유물을 통해 3~4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길성리토성과 함께 주목해볼 유적으로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에서 확인된 마하리 고분군을 들 수 있다. 사적 제451호인 마하리 고분군은 경부고속철도의 건설 과정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수백 기의 고분 가운데 66기의 백제 고분이 확인된 바 있다. 이 가운데 몇 기가 횡혈식 석실분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기존의 묘제와는 다른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를 대표하는 묘제 양식으로, 이를 통해 백제의 중앙에서 쓰던 묘제 양식이 지방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백제와 지방 세력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길성리토성과 마하리 고분군은 의미가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 금동관과 중국제 도자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그렇다면 당시 백제의 중앙과 지방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흔히 우리는 왕이라고 하면 신하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당장 조선시대만 해도 중앙집권적인 체계에서 왕의 말은 법인 <경국대전>보다 상위에 존재했다. 하지만 시계를 삼국시대로 되돌려 보면 왕과 신하의 관계는 달랐다. 당시 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왕 못지않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재상 회의로 불리는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나 백제의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회의를 통해 왕도 폐위할 수 있을 만큼 나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바로 왕과 신하의 관계로, <삼국사기>를 보면 왕권과 신권의 균형과 대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화성시 향남읍 요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백제의 지방 통치에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사진제공=문화재청)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따라서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역시 중앙집권적인 방식이 아닌 왕이 지방 세력의 힘과 권위를 인정해주는 방식의 비교적 느슨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유물이 바로 백제가 통치한 지역에서 확인되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중국제 도자기다. 해당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러한 문화재는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통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이 가운데 길성리토성에서 멀지 않은 요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4~5세기 백제와 당시 화성에 있던 지방 세력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백제 왕이 쓰던 금관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장식이 유일하다. 따라서 지방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백제의 왕이 쓰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금동관은 화성 요리를 비롯해 공주 수촌리 고분군과 익산 입점리 고분군, 전남 고흥 신두리 고분 등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 옛 백제의 통치 지역에서 확인된 바 있다. 또한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있는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도 확인되기도 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장식. 왕이 쓰던 관장식과 출토된 금동관은 차이를 보인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계수호

또한 최근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 사업 과정에서 확인된 감일동 고분군에서 횡혈식 석실분의 묘제 양식이 확인된데 이어 중국제 도자기인 ‘청자 계수호’를 비롯해 ‘부뚜막형 토기’가 출토된 점은 주목해 볼 만하다. 이러한 금동관과 중국제 도자기가 출토되는 것은 백제의 중앙이 지방의 유력한 세력에게 하사한 하사품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백제의 지방 통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오산에는 백제 때 쌓은 독산성이 남아 있는 등 백제 역사에 있어 수원과 화성, 오산은 한성백제 시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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