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네 살이 된 아이는 요즘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다가도, 질문의 빈도수가 많아지면 슬쩍 못들은 척하기도 한다. 특히 어려워지는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과일 ‘배’와, 사람 몸의 ‘배’의 경우. 아이는 처음에 헷갈려했다. 본인이 알고 있는 ‘배(먹는 배)’와 아빠 뱃살 ‘배’를 혼동했다. 최근에야 같은 말, 전혀 다른 뜻을 인지한 듯하다. 내가 봐도 우리말은 참 어렵다. 요즘 TV프로그램에 나와 우리말을 모국어마냥 잘하는 외국인들을 볼 때면, 그저 존경스럽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엔 늘 지참해야 할 준비물이 있었다. 국어사전이었다. 국어사전이 없을 경우 수행평가 점수에서 감점이 됐나 그랬다. 필사적으로 챙겨야했다. 귀찮기도 했다.

그러나 모르는 단어를 직접 종이를 넘겨가며, 찾아가며, 형형색색 형광펜에 색칠을 하면서 나름의 희열을 느꼈다. 우리말의 다양함을 찾는 공부에 대해. 빳빳하고 큼직한 벽돌과도 같았던 사전이 손 떼 묻어 점차 ‘내 것 화’ 되어갈 때, 사전은 더 이상 ‘종이벽돌’이 아니었다.

얼마전 영화 ‘말모이’를 봤다. 국어사전을 끼고 공부했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 등이 편찬하려다 끝내지 못한 우리나라 최초 국어사전의 이름이다.

영화는 목숨을 걸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려고 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았다. 아들 학비 때문에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의 가방을 훔쳤다가 조선어학회 사환으로 일하게 된 까막눈 판수(유해진)는 글을 깨치면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사전 편찬에 참여한다. 극중 유해진이 ‘휘갈기다’, ‘후려치다’ 등 우리말의 비슷하고도 조금씩 다른 단어를 몸과 말로 설명하려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사전을 편찬하려고 했던 시대정신이 느껴졌다.

한 시인은 친구들에게 줄곧 국어사전을 선물한다고 했다. 사전에는 세상 모든 축하의 선물과 인사가 품는 말들이 다 들어있다는 의미에서다. 고등학교 시절 품고 다녔던 사전이 어디로 갔나 궁금해진다.

‘말모이’의 주인공들과 같은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정철 저‧사계절)’이라는 책이 얼마전 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웹사전 편찬자와 종이사전 편찬자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사전 편찬의 어려움, 노고에 대해 알 수 있다. 압축과 정제, 궁극의 편집세계, 고도의 지적 기술(수많은 예문을 모아놓은 말뭉치 안에서 어휘와 예문을 얼마나 잘 꺼내느냐)이 있어야 가능한.

엄유나 ‘말모이’ 감독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우리말과 글을 조선어학회로 보내 온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 유해진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우리말을 좋아한다고. ‘말모이’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가진 것도, 뽐낼 것도, 별로 없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던. 그래서 그들의 삶은 ‘지지 않는 삶’이었다. 나 역시 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우리 말 단어를 마음속에 품고 살고 싶다.

조백현 발행인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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