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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시대, 조선 최고의 통사 <동사강목>을 저술한 순암 안정복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2.02 12:27

흔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떠올리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떠올리기 쉽다. 물론 이 두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전체 역사를 다룬 ‘통사(通史)’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연 <동사강목>을 들 수 있다. 동사강목은 실학의 시대에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책으로, 특히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조선시대의 다른 역사서와 달리 나름의 체계적인 교차분석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안정복의 서재이자 강학 공간으로 사용된 이택재

지금이야 역사학에 있어 교차분석이나 발굴조사의 성과를 통한 고고학적 분석 등이 결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만 해도 문헌사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순암 안정복(1712~1791, 이하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우리의 자료만이 아닌 중국과 일본 등 당시 구할 수 있는 사료에 대한 교차분석을 통해 우리 역사를 고증했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시대 최고의 통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지위로 올랐던 것이다. 이러한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였다. 안정복이 주로 살았던 광주는 지금도 서재와 강학 용도로 쓴 ‘이택재(麗澤齋)’와 안정복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동사강목> 속 안정복의 역사 인식

우선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쓰게 된 이유는 <동사강목>의 ‘서(序)’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소략하고, 사실이 틀리다는 점을 적고 있으며, <고려사>는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과 <여사제강>, <동사회강> 의례 혹은 필법이 어그러졌음을 적고 있다. 따라서 오류로 인한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바로 잡기 위해 <동사강목>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사강목>은 통계를 밝히고, 찬역의 시비를 바로하고, 충절을 비롯한 전장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역사서에 그 기준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안정복이 저술한 <동사강목> (사진=실학박물관 소장, 직접 촬영)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우리 역사의 정통을 ‘단군-기자-마한-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봤는데, 위만의 경우 저술 원칙에 있어 찬역의 범주에 해당되어 포함이 되지 않았다. 반면 마한의 경우 당시 안정복의 스승인 성호 이익이 ‘삼한정통론’을 주장한 바 있고, 당시의 분위기는 마한을 정통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에서 마한정통론을 주장, 우리 역사의 인식을 보여줬다. 특히 안정복은 ‘지리고’를 통해 여러 사료의 교차분석을 통해 위치를 고증했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봐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또한 안정복은 역사를 접근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역사를 읽는 자는 반드시 먼저 강역을 정해놓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점거(占據)한 상황을 알 수 있고, 전벌에서의 득실을 살필 수 있고, 분합의 연혁을 상고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보는 데 어둡게 된다.”

- 안정복, <동사강목> 부록 하, 지리고

특히 ‘사군고(四郡考)’를 통해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축출되었는데, <자치통감> 기록을 분석해 요서에 새로운 낙랑군을 설치했음을 밝히고 있다. 즉 교치(僑置)된 낙랑군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료의 교차분석을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규명하고자 했는데, 주석을 통해 <요사지리지>를 비롯한 <성경지> 등의 여러 기록들의 오류를 밝히고 있다.

“<성경지>에는, <요사지리지>에 ‘숭주는 본시 한의 ‘장잠현(長岑縣)’인데, 동경(東京) 동북 1백 50리에 있다.’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이 설은 잘못이다. 장잠이 만일 ‘요지(遼地)’에 있다면, 뒤에 어떻게 대방에 속하였겠는가?”

- 안정복, <동사강목> 부록 하, 사군고

미추왕릉. ‘죽장릉’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다른 괴설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잇던 안정복이 취사해서 남겼다. 당시 편찬기준인 유교적 관점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의 멸망을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사비성 함락과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의 항복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안정복은 백제부흥군의 왕으로 추대된 풍왕(=부여풍)까지 백제의 역사로 인식했다. 또한 ‘괴설변증(怪說辨證)’을 통해 우리 역사에 괴설이 많다며, “괴설을 망령된 선비들의 조작”으로 보고, ‘산삭(刪削)’했다. 그럼에도 ‘죽장릉(竹長陵)’이나 ‘만파식적(萬波息笛)’처럼 “음병이 남몰래 도와준 일과 충혼이 국왕에게 보답한 일”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여겨 앞선 편찬 기준에서의 유교적 기준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광주시 중대리에 자리한 안정복의 흔적

이처럼 조선시대 최고의 통사인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의 흔적은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 중대동 일원은 안정복의 서재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한 장소가 바로 ‘이택재’인 셈이다. 한편 이택재와 함께 주목해볼 장소가 바로 안정복의 묘로, 가는 길은 이택재를 지나 갈림길에서 좌측 방향으로 끝까지 가면 ‘아트리움’ 빌라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안정복의 시비와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짧지만 오르막이 가파른 관계로 쉬운 코스는 아니다.

안정복의 묘
안정복의 묘에서 바라본 중대동 일원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 보면 안정복의 묘를 마주하게 되는데, 외형상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상석과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 동자석이 각 1쌍씩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묘 자체가 산에서 꽤 높은 위치라 이택재를 비롯해 중대공원 등 중대동 일원의 모습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편 체계적인 고증을 통해 조선시대 최고의 통사 <동사강목>을 남긴 안정복과 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광주시 중대동 일원은 실학의 역사를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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