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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의 명성과 변절했다는 비판 사이에서, 최항 선생의 묘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3.24 23:50

우리 역사 속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재능이라는 요소는 중요하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의(義)’로, 특히 왕조 시대에 중요한 잣대로 평가를 받았다. 단적인 예로 조선 초 세조의 왕위 찬탈을 들 수 있는데, 계유정난(1453)을 통해 조정을 장악한 뒤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했던 세조의 행위는 왕위 찬탈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이러한 정국의 상황에서 당대의 학자들은 양 갈래의 선택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유학을 배운 선비들이 명분 없는 왕위 찬탈에 동조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위치한 최항 선생의 묘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인물들이 바로 집현전 출신 학자들로, 성삼문이나 박팽년처럼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이들도 있는 반면, 신숙주와 정인지, 최항처럼 계유정난에 동조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단적으로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관료와 외교관, 군사적 재능이나 업적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의(義)’라는 관점에서 사육신이 복권되며 신숙주의 위치는 애매해져 변절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항 선생(1409~1474) 역시 능력과 평가가 반대인 경우로,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위치한 최항 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33호)를 통해 학자로서의 명성과 변절했다는 비판 등의 시대상을 조명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최항 선생

최항 선생(이하 최항)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 관리와 학자로서 명성이 있었던 인물로,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종과 문종, 세조, 예종실록의 편수관을 거쳤다는 점이다. 단종의 경우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기에 실록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신이 살아있을 당시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있어 모두 관여를 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최항은 1434년 문과 25명 가운데 장원 급제로 집현전부수찬이 되어 관리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최항의 행적을 보면 서적의 편찬이나 주석을 다는 등 학자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측면에서 바라본 최항 선생의 묘

대표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점과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사> 열전, <동국통감>, <경국대전> 등의 수많은 서적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5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지속적으로 편찬에 참여한 것을 보면 재능과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는데, 당시 최항이 안질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로 치면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세종은 현감을 지낸 정중건과 함께 평산의 온정으로 가서 목욕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 업적과 대조를 이루는 ‘의(義)’, 사육신과 평가와 대조를 이루다.

하지만 계유정난은 최항에 대한 평가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을 지지했던 최항은 이러한 영향으로 정난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다. 또한 1455년 최항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세조가 부의(賻儀)를 내려주기도 했다. 또한 벼슬 역시 간략하게 줄여 ‘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이조판서-좌의정’을 거쳐 만인지상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는데, 정1품의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고,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해지는 등 관료로서의 삶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최항의 행적은 같은 성균관 학자인 성삼문과 박팽년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최항 선생 묘의 신도비
최항 선생 묘의 신도비

특히 최항은 당시 훈구파에 속했는데, 조선 중기가 되면 훈구파는 소멸하고,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환경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절의를 보인 사육신은 높여지는데 비해 신숙주나 최항 등은 기회주의자 내지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업적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최항 선생의 묘는 신도비를 시작으로, 묘역 아래 종택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최항 선생의 묘를 만날 수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두 기의 비석이다. 파손이 된 비석은 애초에 묘가 조성될 때 세워진 비석으로,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항의 처남이자 당대의 학자인 서거정이 지었다. 이를 통해 당대의 명문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최항 선생의 묘
묘역 아래 자리한 최항 선생의 사당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항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서씨가 성질이 사나웠고, 가정일은 모두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항 선생의 묘의 외형은 크게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에 묘표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좌우로 문인석 1쌍이 자리한 모습이다. 앞서 양 갈래의 길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학자로서의 명성과 배신자라는 낙인 사이에서, 분명 학자로서 최항이 이룬 업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한 인물을 평가하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최항의 삶보다는 성삼문이나 박팽년의 삶이 더욱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즉 당대의 관점에서 재능이나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의(義)’ 역시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최항 선생의 묘는 나름의 상징성을 가진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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