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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매송면을 중심으로(2) : 실학의 시대, 중농학파 중 한 명인 취석실 우하영의 묘와 수성 최씨 시조묘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3.31 21:47

앞전에 소개한 추연 우성전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취석실 우하영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위치상 우성전의 묘가 있는 산 바로 뒤, 또 다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위성지도를 보면 우성전의 묘와 우하영의 묘 사이의 옛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열쇠고리의 형태를 닮은 것을 볼 수 있다. 우하영 선생(1741∼1812, 우하영)은 호는 취석실로, 중농학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우하영의 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학이라는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크게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바꾼 것뿐만 아니라 조선 내부의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되는데, 바로 대동법(大同法)의 도입이었다.

전면에서 바라본 우하영의 묘

그 이전까지 과도한 특산품(=공물)을 조세로 내야 했던 것에 비해 대동법의 시행 이후 토지를 소유한 자에 한해 토지 1결당 12두의 백미로 조세제도를 개편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보다 안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또한 대동법의 확장 이후 조선사회는 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의 경제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개혁 조치들을 시행하게 되고, 표면적으로 조선 사회는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학문, 여전히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사회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는 달리 학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조선은 성리학에 매몰된 상태였고, 이것이 더욱 심화되어 보수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도 잘 드러나는데,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청나라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여전히 오랑캐로 멸시한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에 감명을 받아,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 ‘북학(北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경직된 학문 체계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었는데, 이를 통상 ‘실학(實學)’으로 부르고 있다.

가평 조종암(朝宗岩). 조선시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남양주에 위치한 실학 박물관의 전경

당시 실학은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중농학파와 연안 박지원이 중심이 되는 중상학파, 추사 김정희가 중심이 되는 실사구시파 등으로 분류가 되는데, 이 중 우하영은 중농학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우하영은 평생 관직에 나서지 않고, 향촌 지식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천일록(千一錄)’이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순조 때인 1804년, 우하영이 천일록을 올렸는데, 순조는 이에 가상하다는 치하와 함께, 살펴보고 채택하도록 하겠다는 비답을 내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우하영의 이름이 알려진 건 반복되는 재해 속에 정조가 이에 대한 방안을 묻는 ‘구언하교(求言下敎)’를 내리면서 시작된다. 이때 우하영은 13조목으로 알려진 시무책을 올리게 된다.

우하영이 쓴 천일록

<조선왕조실록>에는 우하영이 올린 13조목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우선 정조는 13조목이 모두 백성과 나라 살림에 쓰임이 있다고 칭찬한 뒤 하나씩 실행 가능 여부를 알려주고 있다. 가령 우선 수차(水車)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들기에 여러 고을에 일괄적으로 보급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토지의 경계에 관한 부분에서 효과는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뽕나무를 심는 일은 화성(華城)에서 시작한다거나 소학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 사치를 금하는 일의 경우 점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우하영의 시무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 우하영의 묘와 함께 보면 좋은 수성 최씨 시조묘

이러한 우하영의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는 이정표가 있기에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길에서 5분가량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하영의 묘를 마주할 수 있는데, 비석과 석물이 없는 간소한 모습이다. 향촌의 지식인으로 살았던 우하영의 묘를 통해 민생을 우선시했던 그의 생각과 실학의 시대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향촌 지식인으로 살았던 우하영. 그의 생각과 실학의 시대를 마주할 수 있는 곳

한편 추연 우성전의 묘를 기준으로 오른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수성 최씨 묘(화성시 향토유적 제17호)가 자리하고 있다. ‘수성(隋城)’은 수원의 옛 지명으로, 수성 최씨의 시조는 최영규다. 최영규는 본래 경순왕의 13세손이었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이곳의 호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당시 수주 일대는 풍속과 기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한 최영규는 선정을 베풀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러자 충렬왕은 공을 높이 사 ‘사성(賜姓)’, 즉 최씨 성을 주고, 수성백으로 봉했다. 이러한 이유로 최영규는 수성 최씨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수성 최씨 시조묘로 가는 길.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수성 최씨 시조묘의 전경
매송면 천천리에 소재한 매곡서원지

수성 최씨 시조묘는 묘역으로 들어서기 전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고, 묘는 최영규와 아내인 이천 서씨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이처럼 추연 우성전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로 우하영의 묘와 수성 최씨의 시조묘를 만날 수 있어 화성시 매송면을 중심으로 붕당과 임진왜란, 실학과 고려 후기의 시대상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현장이다. 이와 함께 이곳에서 멀지 않은 매송면 천천리에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했던 ‘매곡서원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함께 주목해보면 좋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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