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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에 자리한 중종대왕 태봉이 빈껍데기인 이유는?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3.31 22:09

예나 지금이나 엄마의 배속에 있는 태아는 생명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태아의 탯줄은 소중하게 보관했는데, 보통 탯줄을 봉안했던 장소를 태실(胎室)이라고 불렀다. 즉 ‘태실=태를 봉안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왕실 자손의 경우 전국의 명당에 태실을 배치했다. 이를 ‘장태(藏胎)’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건 보통 왕릉의 경우 도읍에서 백 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규정이 있는 반면 태실은 이런 거리 제한이 없어 지금도 경북 성주나 예천 등지에서 태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태실의 관리 역시 엄격했는데, 실제 1529년 세자의 태실에서 실화, 즉 실수로 불이 나자 이에 그 죄를 물어 영천 군수 허증을 체직(遞職) 시키기도 했다.

중종대왕 태봉의 전경
태 봉안 행사의 재현.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한편 ‘태봉(胎封)’이라는 말이 있는데, 봉할 봉(封)을 써서 태실을 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태실 가운데 왕이 된 경우 태실의 격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태봉이 이루어지면 석물과 태실비 등이 추가로 설치된다. 따라서 세자나 원손 등 왕위에 오를 예정인 이의 태실의 경우 조성될 때 추가로 석물을 배치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예외는 있는데, 세조나 중종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중종의 경우처럼 애초에 다른 곳에 태실이 있었는데, 왕위에 오른 뒤 가평군으로 옮겨져 현재의 중종대왕 태봉이 만들어졌다. 또한 왕의 태실이 있다 해서 고을의 격이 한 단계 높여진 사례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의미의 ‘태봉(胎峰)’이 있는데, 봉우리 봉(峰)을 써서 태를 묻은 봉우리로 해석된다.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산의 이름이 ‘태봉(胎峰)’으로 불리고 있다.

■ 경기도의 유일한 왕의 태실, 중종대왕 태봉

이러한 왕의 태실 가운데 현재까지 경기도에서 확인된 왕의 태실은 두 기로 성종과 중종이다. 성종의 경우 본래 광주시 태전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창경궁에 복원이 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경기도에 설치된 태실은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에 있는 중종대왕 태봉(中宗大王 胎封,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이 유일하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으로 불렸다. 본래 연산군이 왕이 되었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진성대군은 왕실의 종친으로서 삶을 살았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권력에 취한 채 비틀거린 연산군은 스스로 폭군의 길을 택했고, 결국 ‘중종반정(1506)’으로 인해 연산군은 폐위되고 반정세력들에 의해 진성대군이 왕으로 옹립되니 이가 중종이었다.

태항아리가 묻힌 태옹(胎甕)
태옹 아래 태항아리가 묻힌 모습 재현.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따라서 중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본래 다른 곳에 있었을 태실을 가평군으로 옮겨 지금의 중종대왕 태봉이 만들어졌다. 또한 만들어진 태실의 관리 역시 엄격하게 이루어졌는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 때인 1725년, 종종의 태봉 석물이 파손되자 이에 관상감 관원을 보내 개수를 하게 했다. 때문에 지금도 태실이 있던 자리를 태봉이라 부르고, 주변의 마을이나 지명에 태봉이 들어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중종대왕 태봉은 현재 외형만 남아있는 빈껍데기일 뿐 실제 중요한 태항아리는 이곳에 없다. 이는 역대 왕들의 태실 모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양 서삼릉의 태실. 중종의 태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중종대왕 태봉과 비교해보면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역대 왕들의 태실 전부를 지금의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이러한 행태에 대해 일제의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조선이 유지되었을 때 관리가 되었을 태실이 이처럼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하는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실감시켜 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중종대왕 태봉의 경우 태항아리가 옮겨진 뒤 남겨진 석물은 이후 파괴가 되고 땅에 묻혀 행방을 알지 못하다가 지난 1982년 그 존재가 확인이 되었다. 안내문을 보면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다가 발견을 해서 1987년에 복원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종의 태항아리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중종대왕 태봉이 아닌 서삼릉의 비공개 지역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중종대왕 태봉의 태실비. 귀부의 머리와 태실의 중간 부분이 훼손되었다.
또 다른 태실비. 글자를 쪼아낸 흔적이 선명한데, 인위적인 훼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중종대왕 태봉의 경우 접근성이 나쁘지 않아 차를 타고 이동할 경우 산 아래 200m까지 갈 수 있다. 중종대왕 태봉이 산의 정상에 있기는 하지만 그리 높은 경사가 아니라 이동하는데 크게 부담이 없다. 중종대왕 태봉의 외형은 보물로 지정된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보물 제1976호)나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와 비교해보면 상태가 좋지 못한 편이다. 특히 난간석이나 태실비를 보면 누군가 인위적인 훼손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태실비의 글자는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쪼아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현재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왕의 태실로, 외형에서 드러나듯 이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상징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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