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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의 원찰인 보광사, 어실각(御室閣)을 세우고 향나무를 심은 영조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4.23 09:18

역사 속의 한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결과 이외에 인물의 심리에 대한 부분을 주목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행위의 결과만을 보고 문제라고 해석할 경우 전후사정이 모순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원에 살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 중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가 있는데, 처음에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사실은 지금이나 당시의 관점으로 보려고 해도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파주 보광사의 경내에 자리한 어실각

임오화변(1762)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우리 역사의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켜 훗날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수원부의 읍치 화산으로 옮겨지고, 현재의 수원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만큼 수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처음 임오화변을 접했을 때 ▲정치적인 부분에서의 해석 ▲사도세자의 정신병=영조의 강압 ▲세손이라는 보호 장치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참변이 있었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최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해 접근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화성 융릉. 임오화변의 나비효과로 현륭원의 천봉과 수원 화성의 축성이 이어졌다.

물론 위의 해석들이 요인이 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임오화변(1762)을 초래한 건 영조 자신으로, 이는 영조가 살아왔던 환경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조를 자신의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역사에 남게 만들었던 것일까?

■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혈통의 콤플렉스를 느껴야 했던 영조

잘 알려져 있듯 영조(=연잉군)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로, 내명부의 품계도 없는 무수리 출신에 정1품 빈(嬪)으로 책봉되었다. 아마 정실왕비의 소생이나 다른 후궁들의 자식이 많았다면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삼종의 혈맥이라고 해서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으로 이어졌는데, 반면 이 시기 남아의 출생은 정말 희귀했다. 당장 현종의 경우 후궁을 두지 않았기에 숙종이 유일한 남자였고, 숙종 역시 왕비에게서 소생을 얻지 못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영조에게 숙종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숙종의 경우 후궁에게서 5남을 두었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장성했던 이가 바로 경종과 영조였다. 따라서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에도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경종 때인 172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연잉군이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경종 이외에 유일한 숙종의 후계였던 연영군을 살려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숙빈 최씨의 소령원. 연잉군 시절의 영조가 직접 지관을 데리고 찾은 장소다.

한편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난 뒤 장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연잉군은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초 숙빈 최씨의 장지로 조성된 곳은 현 성남시 수정구 영장산 일대였다. 그런데 이곳에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가 있다는 이유로 숙종의 대노와 함께 다시 선릉 인근으로 장지를 수정했지만 이 역시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연잉군은 직접 지관을 데리고 숙빈 최씨의 장지를 찾아다닌 끝에 현 파주시 광탄면에 묘를 쓰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소령원(昭寧園)이다.

■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격상,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과 어실각을 세우다.

경종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추숭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격상되었으며, 지금도 소령원의 원역에는 소령묘 때의 묘비(墓碑)와 소령원으로 격상되면서 세원 원비(園碑)가 남아 있다. 본래 조선왕릉의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에 한해 붙여진 명칭으로, 영조의 즉위와 함께 숙빈 최씨는 원의 격에 해당되었기에 조성될 수 있었다.

파주 보광사. 소령원의 원찰로 조선왕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한편 소령원과 함께 주목해볼 장소로 소령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파주 보광사다. 얼핏 일반적인 사찰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사찰의 특별함은 바로 소령원의 원찰이라는 점이다. 원찰(願刹)이란 보통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실제 보광사의 경내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각(御室閣)이 남아 있다. 이처럼 능묘 인근에 원찰을 세우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때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원찰로 감은사(感恩寺)를 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전면에서 바라본 보광사 어실각
어실각의 내부

또한 수원의 가까이에 있는 용주사(龍珠寺) 역시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 추존 장조)의 원찰로, 당시 두부를 공급하는 사찰인 조포사(造泡寺)의 역할을 했다. 재미있는 건 당시 용주사의 제향 물품 중 수원 약과가 있었는데, 이 약과가 수원을 대표하는 명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찰은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는 점과 영조가 파주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로 지정하고, 이곳에 어실각을 세운 것은 영조의 애틋한 효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어실각에 자리한 향나무.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임오화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영조의 삶을 이해할 때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어머니의 낮은 신분과 혈통의 콤플렉스는 영조로 하여금 완벽함을 추구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자신의 아들은 내가 당했던 이런 수모를 겪지 않고 완벽한 왕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통용이 되는 이야기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SKY캐슬>을 보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생각이 나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원릉

이런 관점에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큰 책임은 영조에게 있지만, 이러한 영조를 만들었던 건 결국 숙종과 어머니 숙빈 최씨, 그리고 영조를 둘러싼 환경적인 부분까지 함께 봐야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임오화변은 아들은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문제를 넘어서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한번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주목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소령원과 인근의 파주 보광사 어실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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