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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수원 화성에 자리한 홍난파 노래비를 아시나요?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5.07 19:25

수원의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는 팔달산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청동기 시대의 흔적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비롯해 수원의 상징인 수원 화성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수원 화성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서장대에 오르면 수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정상 부근에는 3.1독립운동 기념탑을 비롯해 대한독립기념탑 등이 세워져 있다. 또한 수원 화성의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팔달산을 걷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팔달산에 세워진 홍난파 노래비

한편 수원 화성의 성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城神祠)를 지나 남포루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살구나무 뒤로 노래비 하나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홍난파 노래비로, 첫 인상은 뜬금없는 장소에 세워진 느낌을 받게 된다. 실제 홍난파의 경우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해당 장소에 세워진 노래비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홍난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방치된 듯 낡은 홍난파 노래비를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친일논란과 홍난파에 대한 상반된 평가

가장 먼저 홍난파(=난파 홍영후, 1898~1941)의 경우 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활초리에는 홍난파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의외로 수원에서도 홍난파와 관련한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호매실IC에서 수원역 방향의 길 이름이 ‘고향의 봄길’이며, 수원역과 수원 화성에도 세워진 홍난파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실제 수원박물관을 가보면 수원을 대표했던 음악가로 홍난파를 소개하고 있다. 당장 우리가 애창하는 <고향의 봄>이나 <봉선화> 등도 홍난파가 작곡했다는 점에서 홍난파의 음악사적 업적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 소재한 홍난파 생가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기점으로, 72일간 옥살이를 했던 홍난파는 출소 이후 친일 관변단체에 참여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음악을 통해 일제를 찬양했던 홍난파의 행적은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친일논란은 훗날 꼬리표가 되어 수상자들이 홍난파 음악상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수원 화성에 세워진 홍난파 노래비가 세워진 시기인데, 뒤에 있는 동판을 통해 1968년 10월 15일 화성문화제 때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래비의 외형은 크게 전면에 홍난파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있고, 아래 ‘고향의 봄’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의 상단. 홍난파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
노래비의 뒷면. 196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 1965년에 문화훈장이 추서된 것에서 보듯 당시에는 친일논란이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90년대 이후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지는 등의 변화와 홍난파의 친일행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증가했다. 이를 보여주듯 함께 노래비를 방문했던 김봉집(광교IT기자단) 단장은 “한때 홍난파 노래비의 동판이 없어져 청계천에서 찾았다”는 증언을 했다. 재미있는 점은 전면의 동판에 ‘고향의 봄’이 새겨져 있는데, 작곡가가 바로 아동문학가로 유명한 이원수(1911~1981)이다. 특히 이원수의 부인인 최순애(1914~1998)가 작사한 오빠생각이 바로 수원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홍난파 노래비에서 찾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다.

■ 예술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분리해서 바라봐야

분명한 사실은 홍난파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은 선행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1937년 옥고를 치른 이후 홍난파가 친일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당시 먹고 살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옹호론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에 투신, 저항했음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장 같은 화성 출신이자 문인인 노작 홍사용(1900~1947)이 일제가 검열을 하자 스스로 붓을 꺾어버렸던 사례는 위의 옹호론을 무색하게 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은 더욱 엄격한 잣대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

노래비의 전면에 새겨진 동판. 홍난파의 대표적인 곡인 ‘고향의 봄’이다.
측면에서 바라본 홍난파 노래비. 낡고 볼품이 없는 외형이지만, 여기에 담긴 의미와 역사의 흔적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홍난파의 음악사적 업적은 분리해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물에 대한 평가와 업적을 동일선상에 두고 평가해버리면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가령 이 경우 한국인들의 애창가곡 중 하나인 ‘고향의 봄’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홍난파가 작곡했다고, 이 노래 역시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친일청산은 필요하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와 예술은 분리해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원 화성에 세워진 홍난파 노래비는 외형이 낡고 관리되지 않는 모습이지만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역사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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