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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행궁동과 나혜석, 신여성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나혜석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9.12 02:53

수원 화성의 화서문과 장안문에서 화성행궁까지의 옛 길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223년 전 수원 화성이 만들어진 그 때처럼 골목길 자체는 변함이 없고, 건물만 변해버린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골목길 아래 옛 길의 흔적을 붉은 색 타일로 구분을 해두고 있어, 많은 이들이 오가는 길 위에 여전히 오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옛 길이 자리하고 있는 동네의 이름은 행궁동으로 불리는데, 법정동 중 신풍동(新豊洞)이 있다. 신풍동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서 유래했는데, 신풍이라는 지명은 정조에 의해 내려진 지명이다.

행궁동 골목. 223년 전 축성된 수원 화성 당시의 골목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풍(新豊)은 한 고조 유방이 풍현 출신이라 이후 풍은 제왕이 태어난 곳, 고향을 뜻하게 된다. 실제 조선 왕실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의 경우 전주성의 남문 이름이 풍남문(豊南門)이고, 객사 역시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신풍동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은 것이다. 이와 함께 수원 화성의 객사인 우화관 자리에 신풍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광교로 이전을 한 상태로, 우화관의 복원을 위해 헐려 지금은 옛 사진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수원 화성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혜석의 흔적들

이러한 행궁동의 거리를 걷다보면 유독 눈에 띄는 한 명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사실상 신풍동 곳곳에 나혜석의 생가터를 비롯해 벽화거리, 표석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가 열리는 등 신풍동에서 나혜석은 역사의 인물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나혜석과 관련한 흔적이 많은 것은 나혜석이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에서 출생했고, 수원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나혜석의 흔적이 신풍동과 그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행궁동 골목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나혜석 생가터
나혜석이 졸업한 삼일여학교. 지금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다.

이후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를 거쳐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유교적 관습으로 인해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유학을 가는 등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와 동시에 여성들에게 가혹하고, 모순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후 작품 활동을 통해 이를 표출했다. 단적으로 나혜석이 지은 <인형의 家>를 보면 여성을 인형에 비유, 장벽과 문을 열고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여성의 해방을 갈구한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나혜석이 초기 여성운동의 원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수원천. 나혜석의 미술전람회가 열린 수원포교당

나혜석은 1920년 4월 10일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때 결혼 조건 3가지가 인상적이다. ▲평생 자신을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이었다. 결혼 이후인 1927년 6월 19일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오게 되는데, 1929년 3월 23일 부산에 도착, 그 기간만 1년 8개월이었다. 나혜석은 수원에 도착한 뒤 귀국전시회를 겸해 수원 최초의 미술전람회를 열게 되는데, 해당 장소가 수원포교당이었다. 이처럼 수원 화성 곳곳에서 나혜석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 이름, 나혜석

이처럼 화가와 작가, 여성운동의 관점에서 나혜석은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나혜석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사생활이었다. 분란의 시작은 바로 유럽여행이었는데, 특히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불륜으로 인해 남편인 김우영과 이혼하게 된다. 이후 나혜석은 최린에 대해 자신의 정조를 유린했다며 소송을 걸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있은 뒤 나혜석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했다.

나혜석의 자화상

대부분 나혜석에 대해 신여성의 상징이자 최초의 서양화가, 작가로 인식하는 부분과 사생활에서의 부분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양성평등을 외쳐도,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결국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곱지 못한 시선 속에 나혜석의 말년은 비참했다. 1948년 길에서 세상을 떠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저 행려병자의 죽음으로 기억되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혜석이 과거의 인물이 될 수 없는 건, 여전히 그 이름이 오늘날에도 회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3.1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화학당의 만세운동에 관여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행궁동과 수원 화성 곳곳에 남아 있는 나혜석의 흔적

이와 함께 나혜석은 나름 일제에 저항했던 예술가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일제에 협력하면 더 쉬운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거부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해 친일을 했던 것과 비추어 보면 이 역시도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여성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록 당시에는 좌절되었지만, 지금도 양성평등은 시대의 과제로 평가될 만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행궁동과 수원 화성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나혜석의 이름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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