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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아들과 아버지 (1) - 철종과 전계대원군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10.04 08:54

혈통(血統, lineage)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같은 핏줄의 가계를 의미하는데, 이를 좀 더 확장해보면 부계 혹은 모계 등의 기준으로 가계가 이어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혈통보다 실력이 더 우선시 되는 사회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느 핏줄을 타고 태어난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다. 특히 혈통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할 경우 근친혼이 성행하게 되는데, 유럽의 주요 왕가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왕가나 신라 왕실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 한 사례로 신라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으로,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이다. 즉 삼촌과 조카가 결혼해 낳은 아들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이다. 꼭 이런 사례가 아니라도 유력한 가문끼리 혼인을 통해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는 등 혈통을 지키기 위한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울주 천전리 각석. 원명과 추명으로, 명문을 통해 진흥왕(=삼맥종)의 아버지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 어머니가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인 것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도 혈통은 매우 중요했다. 단적으로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혈통에 관한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의 신분이 품계조차 없던 무수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숙종에게 왕비 소생의 적자나 가문의 힘이 센 후궁 소생의 왕자가 있었을 경우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숙종의 경우 왕비(=명성왕후 김씨) 소생의 적장자로, 혈통의 완벽함을 기반으로 정치력을 발휘한 사례가 있기에 이 같은 혈통을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조선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종 왕실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는 사례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 방계 출신의 왕족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왕의 아들이 아니기에 정치적인 입지가 약해질 수 있었고, 이 경우 대개 왕자나 종친에 불과했던 아버지를 대원군(大院君)이나 왕으로 추존하는 방식으로 이를 보완했던 경우를 볼 수 있다.

숙종의 명릉. 숙종의 경우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정치력을 발휘한 사례다.

실제 조선의 역사에서 왕이 된 아들, 왕자 혹은 종친에 불과했던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추존했던 사례가 4번이 있는데,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 - 하성군(=선조) ▲인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인 정원대원군(=원종) - 능양군(=인조) ▲사도세자(=장조)와 숙빈 임씨의 아들은 은언군 - 전계대원군 - 원범(=덕완군, 철종) ▲사도세자(=장조)와 숙빈 임씨의 아들은 은신군 - 남연군(은신군의 양자) - 흥선대원군 - 명복(=고종) 등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사례들의 경우 이미 죽은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추존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 것에 비해 흥선대원군의 경우 살아 있는 상태에서 대원군에 봉해진 사례로, 당시 국태공(國太公)의 존칭을 받는 등 막강했던 흥선대원군의 위세는 매천 황헌이 쓴 <매천야록>에 잘 나타나 있다.

■ 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특히 철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보면 당시 조선 왕실의 고민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에 접어들수록 왕자의 출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러한 현상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현종 이후 심화된 특징으로, 왕들이 후궁을 들이는 건 왕실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현종에게 왕자는 왕비 소생의 숙종이 유일했고, 숙종의 경우 후궁 소생의 경종(=희빈 장씨 소생)과 영조(=숙빈 최씨 소생)가 왕위를 이었다. 그나마 경종의 경우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영조 역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삼종의 혈맥을 언급하는 부분은 종사를 염려했던 왕의 진심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영조의 어진. 조선 후기로 접어들수록 왕자의 출생이 점점 줄어드는데, 영조의 경우 종종 삼종의 혈맥을 언급하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영조 이후 조선 왕실의 직계는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다. 보통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하면 정조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도세자에게 후궁 소생의 서자들이 있었다. 바로 은언군(=숙빈 임씨 소생)과 은신군(=숙빈 임씨 소생), 은전군(=경빈 박씨 소생)으로, 정조에게는 이복동생이었다. 훗날 ‘영조-사도세자(추존 장조)-정조-순조-효명세자(추존 익종, 문조)-헌종’으로 이어지는 직계가 단절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도세자의 서자 가운데 남아 있는 왕족들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그 결과 ‘영조-사도세자(추존 장조)-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전까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에 불과했던 이광은 전례에 따라 전계대원군에 봉해지게 된다.

포천시 선단동에 위치한 전계대원군의 묘. 첫 번째 부인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와의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묘. 철종의 생모다.

비록 죽은 뒤지만 왕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계대원군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현재 묘역은 포천시 선단동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웬만한 왕릉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큰 편이다. 현재 묘역에는 2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우선 묘역의 중심에 해당하는 전계대원군의 묘는 첫 번째 부인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와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다. 반면 합장묘에서 조금 떨어진 묘에는 전계대원군의 두 번째 부인인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묘로, 용성부대부인은 철종의 생모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 강화도에 있던 철종의 잠저는 ‘용흥궁(龍興宮)’으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왕비와 후궁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지만, 유일하게 영혜옹주만 살아남는 등 자식 복이 없었던 왕이었다. 때문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직계가 단절이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자,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왕으로 지명하게 되는데, 이가 고종이었다.

영월 철종 태실. 영월군 주천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철종의 왕세자 태실로 보기도 한다. 현재 금표비와 덮개석만 남아 있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 전통적인 조선왕릉의 양식으로는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으로, 철종과 전계대원군의 사례를 통해 혈통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왕의 아버지는 대원군이 되었고, 이가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한 시대가 시작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직계 혈통의 단절과 새로운 왕의 옹립 과정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지점이다. 한편 전계대원군과 철종의 사례를 통해 왕이 된 뒤 자신의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추존했던 사례와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혈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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