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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 사도세자의 친동생 화완옹주의 태실인 포천 만세교리 태봉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10.04 12:16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 보면 뜻하지 않게 숨바꼭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 평지에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으로, 해당 문화재가 산에 있을 경우 주소만으로 찾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소개할 포천 만세교리 태봉(포천시 향토유적 제23호) 역시 알려진 주소와 실제 태실이 있는 곳의 주소가 다르기 때문에 주소만으로는 찾기가 힘든 곳이다. 때문에 이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는 경험담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태실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고민을 했는데, 궁여지책으로 포천시청에 연락을 해 해당 태실의 위치와 가는 방법에 대해 문의를 했다. 그리고 담당자가 직접 현장을 다녀온 뒤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기에 큰 시행착오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포천 만세교리 태봉의 원경

포천 만세교리 태봉을 가는 방법은 크게 포천 대원사(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29-1)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대원사 경내의 등산로를 따라 산의 정상으로 이동, 정상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50m 가량 내려가면 태실비와 안내문을 만날 수 있다. 한편 사찰에서 만난 스님께 “이곳에 태실비가 있다던데 어디에 있나요?”라고 물어보니, 바로 옆의 산을 가리키며 정상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태실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존재가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포천의 태실과 관련한 유적지로 ▲ 포천 만세교리 태봉 ▲포천 무봉리 태실 ▲포천 태봉 석조물이 있는데, 이 중 포천 만세교리 태봉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 포천 만세교리 태봉, 사도세자의 친동생인 화완옹주의 태실로 보여

포천 만세교리 태봉은 크게 태실비와 태함의 덮개가 노출이 되어 있는데, 바로 옆에 인위적으로 파낸 구덩이가 있어 도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태실이 누구의 태실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태지석이나 태실비를 주목해야 하는데, 포천 만세교리 태봉의 경우 도굴로 인해 태지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태실비를 주목해야 한다. 태실비는 크게 앞면과 뒷면의 명문으로 나뉜다. 앞면의 경우 출생일과 성별, 신분을 알 수 있으며, 뒷면의 경우 태실을 조성한 날짜, 즉 태실비를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세워진 포천 만세교리 태봉
포천 만세교리 태봉의 태실비. 비두가 고깔 형태다.
포천 만세교리 태봉의 노출된 태함의 덮개 부분

우선 태실비의 앞면을 보면 ‘건륭삼년정월십구일축시생옹주아지씨태실(乾隆三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이라 새겨져 있다. 건륭은 청나라 고종(=건륭제)의 연호로, 건륭 3년은 1738년(=영조 14년)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포천 만세교리 태봉은 영조의 딸인 옹주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부합하는 인물은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의 화완옹주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딸들 가운데서도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딸로,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가 화완옹주의 집에 들렀다는 기사를 수차례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이 시기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영조의 자식에 대한 편애는 사도세자의 병이 악화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매 사이 역시 벌어지게 했던 요인으로 볼 수 있다.

태실비의 앞면. ‘건륭삼년정월십구일축시생옹주아지씨태실(乾隆三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
태실비의 뒷면. ‘건륭삼년삼월이십육일오시입(乾隆三年三月二十六日午時立)’

화완옹주는 1749년 정우량의 아들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과 혼인했는데, 둘 사이에서 딸을 한 명 두었다. 하지만 딸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했고, 1754년에는 남편인 정치달 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과부가 된 화완옹주는 시댁 쪽의 인물인 정후겸을 양아들로 삼았는데, 화완옹주는 정후겸을 앞세워 홍인한, 홍상간, 윤양후, 윤태연 등과 함께 세손(=정조)을 견제했다. 실제 1775년 대리청정을 반대하기도 했는데, 이 같은 행보로 인해 훗날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양자인 정후겸의 처형을 피하지 못했고, 화완옹주는 옹주의 신분을 잃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말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더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현재 화완옹주와 정치달의 묘는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비와 함께 태함의 덮개가 노출된 상태인 포천 만세교리 태봉

한편 태실비의 뒷면을 보면 비석을 세운 날짜를 알 수 있는데, ‘건륭삼년삼월이십육일오시입(乾隆三年三月二十六日午時立)’이 새겨져 있다. 즉 태어난 해인 1738년 3월 26일에 태실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주가 명확한 만큼 문화재의 명칭 역시 바꿔야 하는데, 기존 명칭인 포천 만세교리 태봉 대신 포천 화완옹주 태봉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간 접근성이 좋지 않아 포천 만세교리 태봉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의외로 알고 나면 찾기 어렵지 않기 때문에 이정표와 안내문 등의 접근성의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포천 만세교리 태봉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문화재로, 관심 있게 지켜볼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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