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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아들과 아버지 (3) - 성종과 의경세자(추존 덕종), 선릉(宣陵)에 성종의 시신이 없는 이유는?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11.04 12:13

조선 왕조가 개창한 이래 왕의 아들이 아닌 상태에서 왕이 된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성종(=자을산군, 재위 1469~1494)이다. 성종의 경우 묘호에서 알 수 있듯 세종에 의해 구축된 조선의 교육, 문화의 발전과 함께 정치적 안정을 구가했던 왕으로, 후세에 우호적인 평가를 받는 왕 중 한명이다. 이러한 성종의 군호는 자을산군(=자산군)으로,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추존 덕종, 1438~1457)의 차남이다. 의경세자의 세자 책봉은 계유정난(1453)으로 거슬러가게 되는데,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일파의 정국 주도권이 지속되며 결국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렇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세조(재위 1455~1468)다.

고양 서오릉 내 자리한 덕종의 경릉(敬陵).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세조의 즉위와 함께 맏아들이었던 도원군(桃源君)은 세자로 책봉이 되는데, 바로 의경세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병약했던 의경세자는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세조의 꿈에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 권씨(1418~1441, 이하 현덕왕후)가 나타나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라고 했는데, 이후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화가 난 세조에 의해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이 파헤쳤다고 적고 있다. 물론 해당 이야기의 경우 야사의 성격을 감안해야 하지만 의경세자의 죽음이 세조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위에 오른 자을산군, 성종의 시대가 시작되다

한편 의경세자의 요절과 함께 세조의 차남인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예종(재위 1468~1469)이었다. 예종의 경우 왕비인 안순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제안대군이 있었기에 종법 질서 상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해지게 된다. 다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왕위 계승과 관련해 정희왕후 윤씨(1418~1483, 이하 정희왕후)는 누가 왕이 될 사람인가를 물었고, 이에 신숙주는 대비의 교지로 듣기를 원한다며 정희왕후의 결정을 촉구했다. 그러자 정희왕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권1, 즉위년 11월 28일 기사 중

여기서 원자(=제안대군)의 경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월산대군의 경우 질병을 이유로 제외되었다. 결국 남은 후보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성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봐야할 점은 단순히 나이가 문제였다면 제안대군을 왕위에 올린 뒤 수렴청정을 하거나 혹은 월산대군(1454~1489)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왕위의 결정에 있어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왕비가 되는 공혜왕후 한씨(1456~1474)는 바로 한명회의 딸이었다. 즉 왕위의 결정에 있어 정희왕후를 비롯한 왕실과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울 월산대군 이정 태실
파주 삼릉 중 공혜왕후 한씨의 순릉(順陵). 성종의 왕비로 한명회의 딸이다.
경릉(敬陵) 중 소혜왕후 한씨의 능

우여곡절 끝에 성종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성종의 즉위와 함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성종의 생모인 한씨 역시 소혜왕후로 봉해졌다. 소혜왕후 한씨(1437~1504)는 우리 역사에 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종 대의 조선은 교육과 문화의 관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평가되는데, 조선의 법률인 <경국대전>이 반포된 것도 이때다. 또한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성종 대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를 결정, 훗날 연산군 대 폭정의 씨앗을 남기게 된다. 이 때문에 갑자사화(1504)를 시작으로 조선 정국은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게 되었던 것이다.

■ 선릉(宣陵)에 성종의 시신이 없는 이유는?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폐비 윤씨의 아들(=법적으로는 정현왕후 윤씨)인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연산군(재위 1494~1506)이다. 성종은 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묻히게 되는데, 지금의 선릉(宣陵)이다. 그런데 선릉은 인근에 조성된 정릉(靖陵, 주: 중종의 능)과 함께 42기에 달하는 조선왕릉 가운데 시신이 없는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바로 임진왜란(1592~97)이다. 당시 임진왜란의 전황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들이 명나라의 참전과 평양성 전투로 전세가 역전이 되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한양에 있던 선릉과 정릉은 왜군의 표적이 되어 왕릉이 파헤쳐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소식은 1593년 4월 1일 경기 감사 성영의 장계에 의해 조정에 전해졌다.

선릉(宣陵) 중 성종의 능.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파헤쳐져 현재 시신이 없는 능이다.
선릉(宣陵) 중 정현왕후 윤씨의 능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왜군들이 능을 파헤쳐 소장품은 가져가고, 시신을 담은 재궁(梓宮)은 불에 태웠다고 하는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경우 불탄 재속에 뼈 가루가 섞여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성종과 정현왕후의 시신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때문에 조선왕릉 가운데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없는 왕릉으로 지금까지 그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종의 즉위하는 과정과 성종의 치세, 그리고 성종이 묻힌 선릉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선 초기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장에 남겨진 여러 문화재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해당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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