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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 효명세자(=추존 익종, 문조)의 태실, 포천 태봉 석조물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20.02.02 11:25

현재까지 경기도 포천시에서 확인된 조선 왕실의 태실은 크게 ▲포천 만세교리 태봉(포천시 향토유적 제23호) ▲포천 무봉리 태봉 ▲포천 태봉 석조물(포천시 향토유적 제30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포천 태봉 석조물의 경우 효명세자(1809~1830, 추존 익종, 문조)의 태실 관련 석물로, 현재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640-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태실과 포천 태봉 석조물은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초 효명세자의 태실은 영평현 상리면의 불무산 정상(현 성동 2리 향교골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에 위치한 포천 태봉 석조물

조선이 유지되는 동안 엄격하게 관리되었을 해당 태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굴을 피하지 못했다. 때문에 도굴 이후 태실 관련 석물이 영평천 주변에 흩어진 채 방치되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보존한 것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포천 태봉 석조물인 것이다. 따라서 포천 태봉 석조물은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간직한 문화재로, 특히 경기도의 태실 가운데 태실 가봉이 이루어진 몇 안 되는 사례로 주목해볼 만하다.

■ 태실의 조성 과정을 담고 있는 <원자아기씨장태의궤>와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

다른 태실과 달리 효명세자의 태실 관련 기록은 많은 편에 속하는데, 크게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와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翼宗大王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 등이 있어 태실을 조성했던 절차와 태실 가봉의 상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원자아기씨장태의궤>를 보면 효명세자가 태어난 뒤 관상감에서 삼망단자를 올리게 되는데, 여기에 거론된 태실 조성 후보지로 ▲경기 영평현 상리면 ▲ 강원도 춘천부 수청원 ▲공충도 보은현 외속리산이 언급되고 있다. 세 곳 가운데 효명세자의 태실은 경기 영평현 상리면으로 확정되고, 이어 길일과 길시를 정하는 데 있어 당시의 장태법에 따른 다섯 달 뒤인 1809년 12월 21일 오시(五時)로 결정이 되었다.

포천 태봉 석조물의 귀부
포천 태봉 석조물 중 태함

한편 장태와 관련해 책임자인 안태사는 홍명호로, 태(胎)와 함께 18일 출발, 20일에 영평현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21일 경기관찰사인 김재창과 함께 태를 묻고, 화소(=200보)를 조성하게 된다 이후 효명세자는 1830년 5월 6일, 불과 22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세상을 떠날 때는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아들인 헌종(재위 1834~1849)이 즉위하면서 효명세자는 왕(=익종, 문조)으로 추존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835년부터 효명세자 태실에 대한 태실 가봉 절차 논의가 시작되는데,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에 해당 절차가 잘 기록되어 있다. 요약해보면 태실 가봉과 관련해 1836년(=병신년) 3월 21일 진시(辰時)로 결정되었으며, 관상감 제조 겸 서표관인 신재식과 경기 관찰사 겸 순찰사인 김도희는 20일 영평현에 도착, 21일 미리 준비된 태실 관련 석물을 배치하고 금표(=300보)를 세우게 된다.

■ 남아 있는 석물을 통해 태실 가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효명세자의 태실

이러한 효명세자의 태실은 현재 태실 관련 석물만 일부 남아 있는 모습으로, 해당 석물에 담긴 의미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읽어볼 수 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가 새겨진 하마비(下馬碑)다. 하마비의 경우 궁궐이나 왕릉, 향교나 서원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하마비를 통해 당시 태실이 어떻게 인식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태실 가운데 하마비가 남아 있는 사례는 ▲보은 순조 태실 ▲충주 경종 태실 ▲영천 인종 태실 ▲포천 태봉 석조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천 태봉 석조물의 하마비
충주 경종 태실의 하마비
영천 인종 태실의 하마비

한편 태실 가봉이 이루어진 태실의 경우 크게 태실가봉비와 장태석물로 구분이 된다. 현재 포천 태봉 석조물의 태실가봉비의 경우 귀부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귀부 위에 있었을 태실비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를 통해 태실비의 앞면에 ‘익종대왕태실(翼宗大王胎室)’이, 뒷면에는 ‘도광십육년삼월이십일일건(道光十六年三月二十一日建)’이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태석물의 경우 가운데 조성된 석물 중 개첨석과 중등석이 남아 있는 모습으로, 사방석이 없는 상태다. 이와 함께 덮개가 없는 태함을 비롯해 태실의 난간석(난간석주+횡죽석+동자석주)과 상석 등의 석물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모습이다.

포천 태봉 석조물의 난간석
포천 태봉 석조물의 동자석주와 횡죽석

 현재 경기도에서 태실 가봉이 확인된 사례는 가평 중종대왕 태봉(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으로, 지금은 창경궁으로 옮겨졌지만 광주시 태전동에 있던 성종 태실 및 태실비가 있다. 여기에 포천 태봉 석조물 역시 태실 가봉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를 주목해볼 만하며, 효명세자의 태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만한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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