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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현덕왕후 권씨의 소릉(昭陵)이 있었다고?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20.02.09 21:19

지난 날 안산문화원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안산문화원의 야외를 돌던 중 낯이 익은 석물이 눈에 들어왔다. 석물은 크게 석양과 난간석주, 혼유석을 받치던 고석으로, 해당 석물들의 경우 능(陵)이나 원(園)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물들이 왜 안산문화원에 있을까? 해당 석물 앞에 있는 안내문을 본 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안산에 현덕왕후 권씨의 소릉(昭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덕왕후 권씨(1418~1441, 이하 현덕왕후)는 단종의 어머니로, 문종의 왕비(=현덕빈, 추존 현덕왕후)로, 현재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동구릉 내 현릉(顯陵)에 동원이강릉 형태로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덕왕후의 소릉은 어떻게 안산에 있었고, 또 현 위치로 옮겨졌던 것일까?

경기도 구리 동구릉 내 현릉(顯陵, 현덕왕후 권씨). 최초 현덕왕후의 능은 경기도 안산시 목내동에 소재하고 있었다.

■ 세자빈이 되었던 현덕왕후, 단종을 낳은 뒤 세상을 떠나다

현덕왕후는 본래 문종의 세자 시절 궁인으로 본래 세자궁의 승휘(承徽)로 있었다. 그런 그가 세자빈이 될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여인에 관심이 없었던 문종의 성격이 한 몫을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 총 3번의 혼인을 하게 되는데, 바로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현덕빈 권씨다. 문종의 앞선 두 번의 혼인은 사랑을 받지 못했던 여인들의 기행으로 파국을 맞게 되는데, 특히 순빈 봉씨의 경우는 왕실에 전례가 없던 동성애 사건으로 궁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안산문화원의 야외에 전시된 소릉의 석물. 크게 석양과 난간석주, 고석 등이 있다.
소릉 관련 석물의 안내문. 그런데 안내문에서 무덤을 파헤친 왕이 세종이 아닌 세조이기에 안내문 수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문종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세종은 더 이상 간택을 통해 세자빈을 들이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세자궁의 궁인이었던 승휘 권씨가 세자빈으로 선택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종과 혼인한 세자빈 권씨는 경혜공주와 원손(=단종)을 낳지만, 원손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산후병으로 불과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그녀가 최초로 묻힌 곳이 바로 안산군 와리면 목내리(=안산시 목내동 산 47번지)였던 것이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장녀인 경혜공주의 묘
문종과 현덕왕후의 원손인 단종의 장릉(莊陵)

그러다 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현덕빈이었던 그녀는 현덕왕후로 추존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릉(昭陵)의 능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종의 재위 2년 만인 1452년 세상을 떠나면서, 큰 정치적 풍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다음 왕위는 원손인 단종이 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이다. 이 경우 보통 왕비나 대비에 의한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안타깝게도 단종의 경우 할머니인 소헌왕후 심씨와 어머니 현덕왕후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문종의 다른 형제들, 특히 수양대군을 비롯한 장성한 대군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정치적 환경의 변화는 어쩌면 앞날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왕의 등극으로 의정부를 대표하는 황보인과 김종서 등 신권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의 충돌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던 것이다.

■ 세조의 즉위와 소릉(昭陵)의 비극, 남겨진 석물에 담긴 역사의 이야기

결국 계유정난(1453)으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고, 이후 상왕복위운동을 거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영월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의 소릉은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 파괴되어 한동안 버려진 채 방치된 그녀의 유해는 중종 때 수습되어 현 문종의 현릉으로 옮겨져 안장 되었다. 일설에는 왕위에 오른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의경세자를 데려가고, 침을 뱉은 자리에 피부병이 생겼다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 세조가 단종과 현덕왕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속리산에 있는 목욕소.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소릉의 석물. 석양의 전경

이와 함께 옛 소릉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우물(棺井址)이라 전해지는 곳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소릉이 파헤쳐진 당시 현덕왕후 권씨의 재궁(梓宮)이 바다에 버려졌던 자리가 훗날 육지가 되고 이곳에 우물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은 반월산업단지 일진전기 정문 옆에 지명 유래를 담은 비석이 홀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왕릉의 능호를 받았다는 점,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난 점을 고려해보면 또 다른 석물인 석호와 석마, 문인석 등 역시 조성되었겠지만, 현재 확인되는 석물은 석양과 난간석주, 혼유석을 받친 고석이 확인되고 있다.

소릉의 석물. 난간석주의 전경
혼유석의 받침으로 사용된 고석. 현재 2개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안산을 수없이 지났지만, 이곳에서 조선왕릉과 관련한 흔적을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현재 파괴된 채 간신히 석물 몇 개만이 남아 있는 현덕왕후의 소릉과 관련한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도 그렇고,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해당 문화재가 이런 형태를 하고 있는 것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역사의 숨결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안산문화원에 소재한 소릉의 석물을 주목해보실 것을 권해드린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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