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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 태함만 남아 있는 안산 고잔동 태봉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20.03.02 09:27

안산문화원의 야외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그것이 있다. 화강암 재질의 개석에 4개의 돌기가 있는 형태, 분명 태함이다. 해당 태함은 안산 고잔동 태봉의 옛터에 있던 것을 옮겨둔 것이라고 하는데, 태봉의 위치는 현 고잔 2동 주공 8단지(=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671)다. 그런데 태봉과 관련한 안내문을 보면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태실로 추정하고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태봉과 관련해 고려 시대의 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전승과 무관하지 않다.

안산문화원의 야외에 전시된 안산 고잔동 태봉의 태함

그런데 고고학적으로는 보면 고려의 태실이라는 전승과 안내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고려 태실의 형태가 명확히 규명된 사례가 확인된 적이 없다는 점과 결정적으로 고잔동 태봉에서 확인된 태함은 오히려 조선시대의 태실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조선시대의 태실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해당 태함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 조선 중기에 나타난 태실과 유사성을 드러내는 고잔동 태봉의 태함

고잔동 태봉의 시기를 특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사성을 드러내는 태함과 비교해보면 되는데, 해당 태함의 특징은 개석의 측면에 4개의 돌기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태함은 김포 고막리 태실(=신성군)을 비롯해 청주 산덕리 태실(=인성군)의 태함과 유사성을 드러낸다. 즉 선조 이전의 태함과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지점으로, 이를 통해 고잔동 태봉이 선조 이후에 조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선조의 자녀 태실이거나 그 이후에 만들어진 태실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태함과 함께 있었을 태실비를 주목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고잔동 태봉의 경우 태실비가 없는 상태이다.

안산 고잔동 태함의 개석. 4개의 돌기가 돌출된 형태다.
김포 고막리 태실. 신성군의 태실로 태함의 개석이 고잔동 태봉의 태함과 유사하다.
청주 산덕리 태실. 인성군의 태실로 사진에서 보듯 태함의 개석에 4개의 돌기가 확인된다.(사진 제공=문화재청)

그런데 태실비의 행방과 관련해서 <안산시사>에는 태봉 아래 논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봉에 있는 태실비 때문에 맞은 편 마을에 있는 여자들이 바람을 핀다고 해서 마을의 남자들이 와서 태실비를 뽑아 논에 묻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승의 형태이긴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잔동 태봉에서 최초 태함과 함께 비좌가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아기씨 태실비에서 비좌가 있는 형태는 김포 조강리 태실과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보물 제1976호)에서 처음 나타난다.

즉 비좌의 존재 역시 해당 태실이 선조의 자녀 태실이거나 선조 이후에 나타난 태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좌 역시 관리의 소홀로 행방을 알 수가 없는 상태인데다, 도굴로 인해 태지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고잔동 태봉의 태주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논에 묻혀 있다는 태실비의 연구가 결정적일 것이라 여겨진다.

■ 경기도의 태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문화재 지정 등의 보존 대책 필요

최근 경기도는 보도 자료를 내고 경기도의 태실에 대한 보호와 문화재 지정 등의 관심을 쏟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기도 곳곳에 방치된 태실의 현 주소를 전수 조사했던 터라 이 같은 경기도의 움직임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경기도의 보도 자료 배포 후 많은 언론사에서 관련 기사를 쏟아냈는데, 옥의 티처럼 오류가 있다. 단적으로 본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연천 유촌리 태실의 경우 논문도 그렇고, 기사에서도 영조의 장녀인 화억옹주의 태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해당 태실비에는 출생일이 1728년(=옹정 6년, 영조 4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억옹주의 출생일은 1717년(=강희 56년, 숙종 43년)으로, 해당 태실일 수가 없다.

연천 유촌리 태실. <승정원일기>와 <선원계보도>를 통해 해당 태실이 화억옹주가 아닌 영조의 4왕녀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정정이 필요하다.

또한 조선 왕실의 <선원계보도>를 확인해 보면 영조의 장녀는 1녀라고만 나올 뿐이다. 이는 당시만 해도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기이기 때문에, 직첩을 받기 전에 죽는 경우 이렇게 기록이 된다. 그렇다면 화억옹주의 직첩은 언제 받게 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승정원일기>를 봐야 하는데, 화억옹주의 직첩을 받은 것은 1773년(=영조 49년)으로, 영조는 효장세자의 누나인 1녀에 대해 화억옹주로 추증할 것을 명했다(승정원일기, 영조 49년 10월 7일). 따라서 연천 유촌리 태실의 태주가 화억옹주가 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연천 유촌리 태실은 <태봉등록>의 기록을 통해 화억옹주의 태실이 아닌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의 4왕녀 태실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한번 잘못 알려진 ‘연천 유촌리 태실=화억옹주’는 바뀌지 않고 있다.

화성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화성 정숙옹주 태실비. 태실의 보존 및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경기도의 태실에 대한 전수 조사와 태실에 대한 명확한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와 함께 현재 남아 있는 태실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 문화재 지정 등의 보다 적극적인 보존 대책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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