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계산 아래 마을이 있던 곳. 현재 고인돌 공원. ⓒ물향기신문

옛날 오산 묵암동(지금의 금암동)에는 순녀라는 마음씨 고운 새댁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마에 걸린 고드름이 햇살을 받아 댓돌위에 똑똑 물방울을 떨구고 있던 어느 날, 순녀는 복사꽃 같은 얼굴로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보, 저...아무래도 애기를 가진 거 같아요.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구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정말? 용꿈을 꿨다면 틀림없이 태몽이네. 흐흐 ”
“그런데... ”
“왜?”
“그 용이 시뻘건 피를 흘리믄서 고꾸라져 떨어지지 않겠어요. 어찌나 무섭던지...”
“놀랐겠구먼. 괜찮을겨. 나 닮아서 아주 건강한 놈이 나올 테니께 아무 걱정 말어.”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은 풍성하게 들썩였습니다. 여름 내내 나락을 지킨 허수아비는 참새한테 어깨를 빌려주고 인심 좋은 주인이 남기고 간 까치밥은 감나무 가지에서 달콤하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순녀는 마루에 앉아 제법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이고 새참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으로 농부들의 땀을 식혀줄 요량인가 봅니다.
‘저 솜으로 실을 뽑아다가 우리 애기 배냇저고리를 지으면 이쁠 텐데...!’
순녀는 나른한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국화꽃 같은 향기를 머금었습니다.
“정호 있는가?”
숨을 헐떡이며 싸리짝문에 들어서는 이는 탑동에 사는 소꿉동무인 순돌입니다.
장작을 패고 있던 정호가 순돌이에게 다가가자 순돌이는 귀엣말로 뭔가를 전하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습니다.
“여보, 나 저기 좀 댕겨와야겠는데... 혼자 있기 괜찮겠지?”
“어디를 가는데요? 이제 산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 혼자서 어쩌라구..”
“미안하네. 내 온양댁 아주머니한테 잘 부탁해 놓을 테니 아무 걱정 말구...언능 댕겨올테니 조금만 기다려.”
정호는 순녀가 말릴 새도 없이 옷가지 몇 개를 보따리에 싸서 들고는 순돌이를 따라 나섰습니다. 의병들을 따라 전라도 어딘가로 갔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묻어온 건 정호가 떠난 지 보름이 지난 후였습니다.

왜병들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짓밟으며 한양까지 올라왔지만 조선의 매서운 겨울 맛을 보자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채비를 하지 못해 동상에 걸리고 얼어 죽는 군사가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이 남쪽 바다를 지키면서 왜군의 보급선과 연락망을 끊어 놓는 바람에 왜군은 본국에서의 군량미 조달이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희다수가는 군량미 수송을 돕고 후방과의 연락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원으로 내려왔습니다.
‘음, 여기다 진을 치면 좋겠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올라오면 이 길로 지나야 할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면 좋겠어.’
우희다수가는 황구지천을 끼고 있는 독산성 아래를 비롯해 수원 전역에 서너 개의 진을 치고 보급선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장군, 군사들이 굶주린 데다 조선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마을로 내려가 너희들이 필요한 것을 찾아오도록 해라!”
병사들은 우희다수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소, 돼지는 물론 집안으로 들어가 옷이며 식량까지 몽땅 빼앗아갔습니다.

“그 소식, 들었어?”
“뭔 소식? ”
“아, 글쎄 왜놈들이 마을마다 댕기믄서 아주 쑥대밭을 만들고 있댜”
“그러게. 우리 동네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여. 그래서 난 독산성으루 들어갈라구. 같이 안 갈라나?”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독산성으로 올라갔습니다. 난리가 터질 때마다 찾아드는 아버지 품 속 같은 산성입니다.
병사들이 묵암동(지금의 금암동) 입구에 들어서자 왜장의 낯빛이 시나브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음...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걸. 마을의 지세로 보아 대단한 인물이 날 것이 틀림없다. 어쩐다....’
왜장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한식경을 고민하다가 병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마을에 있는 모든 남자 아이는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도 물론 없애야 한다”
“하이!”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이들을 찾아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왜군들 신발자국에 짓밟히고 죽은 아이를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어미의 울부짖음이 여계산 자락을 쥐어뜯었습니다.
“저기, 순녀 있니?”
온양댁이 순녀네 집 마당으로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습니다.
“어머, 아주머니. 독산성으루 가신다구 허지 않으셨대요?”
“그랬지. 근디 가는 중에 왜놈덜이 애덜이랑 임신부를 몽땅 죽이구 있다구 허잖여. 그래서 네 생각이 나서... 언능 도망가자. 임신헌 사람두 죄다 죽인댜.”
순녀는 운암뜰에 있는 오라버니한테 가려고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산통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아픔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순하게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순녀는 아이를 안고 거북바위 앞에 서서 돌 하나를 얹어 놓았습니다. 논밭 여기저기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를 사람들은 신령스런 바위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거북바위는 아들을 낳고 싶거나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면 그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순녀는 아이를 잘 돌봐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녀, 아닌감? 아이구, 워딜 그렇게 바쁘게 간댜?”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던 똘이 아범이 순녀에게 알은 체를 했습니다.
“아, 예...그냥.... 운암뜰에 있는 둘째 오라버니 댁에...”
“순창이 말여? 어제 독산성으루 간다구 허든디. 거기두 왜놈덜이 쑥대밭을 맹글었댜”
순녀의 다리가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난리가 터지자 의병들과 함께 떠난 남편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순녀는 그렇게 한참동안을 주저앉아 있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여계산 중턱으로 달음질을 치듯 올라갔습니다.
봄이면 동네 아낙들과 진달래 화전을 만들어 먹으려고 꽃잎을 따러 오던 곳이었습니다. 꽃잎을 따다가 지치면 네모난 모양의 넓고 큰 바위에 앉아서 땀을 식히곤 했습니다.
‘그래, 여기면 안전할거야. 아가, 쬐끔만 참어. 거북바위 할아버지가 도와주실 거야’
순녀는 아이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바위틈에 아이를 뉘었습니다. 아기는 통통한 볼에 미소를 지으며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빨리 다녀오라는 듯 맑게 미소 짓는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마을로 내려가야 하는 순녀의 마음은 천근만근이었습니다. 더구나 불현듯 떠오른 태몽은 심장을 바싹 태워가며 순녀의 발목을 붙들었습니다.

“순녀 아닌가! 근디 어디 댕겨왔는가?”
부엌에서 나오는 순녀를 불러 세운 건 건너 마을 송이 아범이었습니다.
“아, 예...저기”
“아이구, 이제 애 나올 때가 다 됐는가베.”
순녀가 배를 어루만지는 시늉을 해가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왜병 하나가 송이 아범 뒤에서 나오더니 순녀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습니다.
퍽!
순간, 순녀의 낯빛이 흑빛으로 변했습니다. 아기 낳은 것을 숨기려고 배에 두른 바가지가 깨진 것입니다.
“아니, 이건 바가지가 아닌가? 이 여자 분명히 애를 낳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순녀의 가슴에서는 뽀얀 젖이 피범벅이가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아이지만 그 곳이라면 안전하게 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순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이봐, 애는 어디 있나? 애는 어딨어?”
두 손을 모으고 어금니를 앙다문 순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병은 주검이 되어 누워있는 순녀를 발길로 걷어차고는 다른 병사들을 모아 아이를 찾겠다며 마을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어도 아기는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습니다.

“으앙~”
아기의 울음소리가 여계산을 뒤흔든 것은 사흘이 지나서였습니다. 왜병들은 울음소리를 쫓아 여계산 중턱 네모 바위에 다다랐습니다.
“장군, 분명 이 바위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어서 입구를 찾아봐라, 어서.”
그러나 입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만 바위를 뚫고 여계산에 울려 퍼질 뿐이었습니다.
왜병들은 바위를 들어보려고 안간 힘을 써봤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되겠다. 톱을 가져 와라. 어서!”
왜병들이 톱질을 하기 시작하자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요. 붉은 피가 네모 바위를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순녀와 아기의 한이 서리서리 맺힌 듯 핏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왜병들은 뒤로 자빠지고 넘어지며 바위에서 물러섰습니다.
“저기, 애가 있습니다!”
두 쪽으로 갈라진 바위 안에는 어여쁜 갓난아기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들어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펴봐라!”
“하이!”
하지만 바위틈은 너무 좁아서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내려 했지만 그조차 닿지를 않았습니다.
왜병들은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버려둔 채 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는 오래도록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계산 중턱에 가면 네모난 붉은 바위가 둘로 쪼개진 채 전설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상희  오산문인협회 회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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