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기획위원)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보람이 뭐였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질문자가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 나온 질문이든 대답은 한결같다. 법이 제정·개정되거나, 예산이 편성되어 사람들의 삶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을 때 가장 보람되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진심이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은 법이 통과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힘들었다. 사실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보람보다 절망이 더 잦았다. 비애감은 정치의 숙명인가 싶을 정도였다. 밤낮없이 노력해서 겨우 작은 변화를 얻었는데, 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더 많은 것이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졌지만, 악화는 쉽고 빠르게 왔다. 아무리 애써도 막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이면 잠을 자다 가위에 눌렸다. 다수 의석을 가진 힘 있는 정당을 만들어 정부를 운영하는 꿈을 꾸었던 것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망과 보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법 중 하나가 「사회복지사업법」이다. 17대 국회에 들어와 처음 접한 사회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실태와 비리는 상상하는 범위 이상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 처우는 물론 성폭행, 폭력, 그로 인한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마성을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조금 횡령, 부당노동행위 등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시설에서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어찌나 폐쇄적인지 내부 고발이 없으면 외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공익이사를 두어 운영의 투명성을 담보하자는 게 핵심이었다. 법안 발의 후 의원실 전화는 항의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홈페이지 게시판도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법인과 시설 운영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우리도 개정안의 통과를 위해 ‘강력한 방법’을 동원했다. 2006년11월27일, 45개 단체와 함께 종로구청에서 국회의사당까지 7.5km를 48시간 동안 삼보일배 했다. 세 걸음을 걷고, 절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가는데,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도 세 걸음에 한 번 멈춰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겨울비가 내려 몹시 추웠던 이날은 10년 전 굶주림, 강제노역, 폭력을 견디다 못한 장애인들이 <에바다복지회> 농성을 시작했던 날이다. 우리 사회가 시설 비리와 인권유린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피눈물의 호소가 무려 10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7대 국회에서 「사회복지사업법」은 개정되지 않았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그런 절망감 속에 18대 국회가 시작되었다.

영화 ‘도가니’를 기억하나? 청각장애인학교인 인화학교와 거주시설 인화원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10여 년 간 교장과 행정실장, 기숙부장, 재활교사 2명 등 교직원들이 청각 장애 아이들을 상대로 성폭력과 학대를 저지른 사건이다. 가해자 중 한 명은 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었다. 학교와 법인의 주요 직책이 친인척으로 구성된 족벌경영 구조는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기까지 오래 걸렸고,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사건을 알게 된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은 삭발시위도 하고, 등교도 거부하며 세상에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도 하고, 242일 동안 장기 농성을 진행하였지만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은 요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영화 개봉 일주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더니 갑자기 온 국민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문제로 10년 이상을 싸웠는데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이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던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생각했다. 관련 단체들과 <광주인화학교성폭력 사건해결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도가니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연대 단체를 만들었다. 2011년12월29일, 재석의원 163명 중 162명의 찬성으로 마침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10년을 싸워 ‘외부이사’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작은 변화를 위해 정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애썼다.

법안의 통과는 사회적 상황과 직결된다. 기득권 집단은 공고하여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좌절되고 나면 짙은 회의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한 싸움이 아니다. 그 시간들이 쌓여 사회적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일명 도가니법이라 불렸던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은 ‘좌절금지’라는 교훈을 남겼다. 바꿔야 하는 게 있다면,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얼마 전 대법원은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피해자 7인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배상청구권은 사건 발생 시점인 1985년 3월~2005년 6월 사이 라며 2012년 3월에 낸 소송은 소멸시효 기간인 5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피해자 측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장애 진단을 받은 때가 2011년이므로 국가배상 청구권이 발생한 시점을 이때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재판다운 재판을 해보지도 못한 것이다. 국가의 책임을 물었는데, 시간이 지났으니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답만 들었다. 다시 물어보고 싶다.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물론 모든 문제의 책임이 국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잘못된 정책, 또는 의도적 책임 방기로 인해 벌어진 ‘제도 안의 폭력’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사건이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이는 1987년 사회정화사업이라는 명분으로 공권력 등을 동원해 사람들을 수용·감금한 사건이다. '부랑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잡아 가두었던 이 사건은 내무부 훈령 410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피해자들은 강제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야 했던 이유와 그 안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형제복지원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은 19대 국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처럼 싸움이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해자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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