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나왔다는 80대 노파가 집을 찾아달라 떼쓰는데 자기 집 근처 가게 이름도 모르는 치매일 때, 기억력 좋을 고등학생들에게 시장과 국회의원 그리고 교육감 이름을 물었을 때 아는 학생이 아무도 없을 때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인들도 국무총리는 물론 자주 바뀌는 장관들 그리고 대통령 이름쯤이야 몰라도 될 태평성대가 눈앞에 펼쳐질 조짐이라서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11월이 되면 생각나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며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덩어리로 거리를 뛰었던 그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역전 광장에서 세월호 노란 리본까지 천막에 매달고 ‘국정화 중단’ ‘노동법 개악, 비정규직 철폐’ 동영상을 반복하는 대형 스크린, 누구도 귀담아듣지도 보지도 않아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휴학하고 광화문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의경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민중총궐기를 저지하기 위해 원칙대로 물대포를 쐈다는데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농민, 그 농민의 목숨을 볼모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농민만도 못한 정치꾼들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무례한 고객 내보내겠다’는 어느 회사의 안내문, 택배 문제로 아파트 입주자 대표를 흉기로 찔렀다는 경비원의 기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누가 갑인지 을인지 모를, 상놈과 양반의 구분이 명확했던 봉건사회만도 못한 이 사회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대한민국 언론은 대통령의 무릎에서 노는 애완견’이라고 외국 언론까지 가세하여 조롱하는 판국에, 보도자료 그대로 알려줘야 착한 언론이 되는 애완견 신세가 된 언론과 종편은 우리는 슬프게 한다. 미국 대통령은 원고를 안 보고도 술술 연설만 잘하는데, 우리 대통령은 써 준 원고도 이해하지 못하는지 프롬프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또박또박 읽는 모습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집 나간 줄로만 알았던 금배지 번쩍이는 국회의원들이 선거철이 다가오니 속속 지역구로 돌아온다. 서로 제 잘났다고 싸우느라 밥값도 못했으면서 자랑 같지도 않은 당연한 일을 내세우는 고래 힘줄보다 질기고 삼겹살보다 두꺼운 그 얼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현장에서 찍은 인증샷만 잔뜩 올린 뻔뻔한 의정 보고서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대기업에는 꼼짝 못 하면서 중소기업 때려잡고 서민들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현 정부의 경제 실책, 따지고 물어야 할 야당은 무엇으로 목소릴 높이고 있는지 몰라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기회는 찬스라며 이참에 개헌론 연기 모락모락 내뿜으며 자신들 정권 연장에만 골몰하는 정치꾼들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경제는 바닥으로 거꾸러지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데 정치인은 당리당략에, 경제인은 세금포탈에 혈안이 되었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가도 검찰청에 출두할 때면 어김없이 하얀 마스크 쓰고 휠체어 타고 끌려가는 재벌총수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보통사람이라면 평생을 감방에 살아도 모자랄 큰 죄지만, 벌금만 내면 보석으로 풀려나와 다시 얼굴에 개기름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지금보다 더한 군부독재시대에도 성철, 김수환 추기경 같은 큰어른이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일갈하시며 중재했는데, 요즘 큰어른들은 무엇으로 세상을 다스리는지 보이지 않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도법스님 등 몇 분 언론과 종편에서 큰어른으로 나섰는데, 아들뻘 한 위원장을 내보내라 외치는 어버이연합은 누구의 어버이인지 몰라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이원규 기자  mail@newstow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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