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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평가를 받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영릉(英陵)’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7.12.26 09:46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한 여주 ‘영릉(英陵)’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재위 1418~1450)의 능역이다. 통상 세종을 떠올리면 ‘세종대왕’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데, 대왕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 한국사를 통틀어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세종의 경우 대왕의 조건에 모두 부합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재위 1400~1418)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1365~1420)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로 충녕대군으로 불렸다. 2차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올랐던 태종은 장자 계승 원칙을 세우고자 맏이였던 양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이러한 태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여러 기행과 구설수에 휘말리며 결국 폐세자가 되었다. 결국 세자의 지위는 충녕대군에게 돌아가게 되고, 이어 태종의 양위와 함께 세종이 즉위하게 된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했던 태종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왕위에 올랐던 세종의 즉위는 조선에 있어 영광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세종대왕의 동상. 조선에 있어 세종은 영광의 문을 열었던 명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주 ‘영릉’의 재실. 현재 매표소 아래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 재실의 터가 확인되었다.

■ 조선의 영광, 그 문을 열었던 세종의 위대한 업적

세종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가정 먼저 거론이 되는 것은 단연 한글 창제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불리는 한글의 창제는 우리의 문자를 갖게 되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쓰고 있는 문자는 민족의 정체성과 고결한 정신을 담고 있기에 한글의 창제는 좁게는 백성들의 문맹률을 낮추는 것에서 넓게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이러한 그릇이 있었기에 훗날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탄압에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세종 때 현재의 우리 국토라고 할 수 있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국토 개척이 마무리가 되었다. 통상 4군6진으로 불리는 국토 개척은 최윤덕과 김종서의 활약으로 서북지역의 4군인 여연(閭延)과 무창(茂昌), 우예(虞芮), 자성(慈城)과 동북면의 6진인 온성(穩城)과 경원(慶源), 종성(鍾城), 회령(會寧), 부령(富寧), 경흥(慶興) 등이 개척되었다. 한때 여진족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자는 퇴배론(退排論)이 팽배해 있었지만 세종의 단호한 국토 수호 의지와 이를 반전시켜 여진족의 내분을 활용해 국토를 개척했던 세종 대의 4군 6진은 한국사에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세종은 정책 브레인이자 훈민정음 창제에도 공을 세웠던 집현전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악기를 비롯한 음악에 깊은 조회를 지녔는가 하면 ‘속육전(續六典)’을 비롯한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세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인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인 ‘자격루’를 비롯해 조선의 과학을 한 단계 진일보시켰다. 이와 함께 ‘신기전(神機箭)’으로 대표되는 무기체계를 개선하고, 천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을 만드는가 하면 조선의 현실에 맞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는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던 조선은 세종에 의해 그 영광의 문을 열었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이러한 영광의 시대에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이루며, 가장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축문을 불태웠던 예감. 초기의 석물인 탓에 그 규모가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전면에서 바라본 ‘영릉’의 능침 공간. ‘영릉’은 최초의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영릉’의 중앙에 설치된 장명등. 그 뒤로 두 개의 혼유석이 자리하고 있다.

■ 새롭게 복원공사가 이루어지는 세종의 ‘영릉’, 온전하게 모습을 찾는 그날을 기다리며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세종은 세상을 떠난 뒤 부왕인 태종의 헌릉(獻陵) 인근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랬기에 소헌왕후 심씨(1395~1446)와 함께 왕릉으로는 최초로 합장릉으로 조성되어 헌릉의 서쪽에 묻히게 된다. 하지만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예종 때에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로 천장이 이루어졌다. 크게 진입 공간과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영릉’은 현재 진입공간과 능침 공간은 복원이 진행 중이어서, 관람이 가능한 부분은 능침 공간이 유일하다. 능침 공간에는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혼유석이 2개 설치되어 있으며, 가운데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가 각 2쌍이 세워져 있으며,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함께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이 세워져 있으며, 석마가 2쌍이 세워져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에 1쌍씩 조성된 문인석과 석마의 모습
‘영릉’의 무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배면에서 바라본 ‘영릉’의 전경. 풍수지리로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영릉’으로 인해 조선이 백 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영릉’은 다른 의미에서 논란이 있어 왔는데, 이는 부실한 복원의 문제였다. 다른 조선왕릉에서 참도는 박석이 깔린 신도(혹은 향로)와 어도(혹은 어로) 등 2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영릉’의 참도는 황제릉인 고종의 ‘홍릉(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처럼 3도로 구성되어 있어 잘못 복원된 사례로 지적이 되어왔다. 세종의 ‘영릉’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있었던 유적 정화사업이 한몫을 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통치의 정당성을 인물이나 유적을 통해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한국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세종이었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유적 정화사업은 유적복원이라는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 그 결과 잘못된 복원이 이루어져 조선왕릉 중 이질적인 부분이 강하게 남았던 ‘영릉’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결정이 되는 과정에서 조선왕릉의 원형에 대한 복원이라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방치된 ‘영릉’의 복원이 결정되었다. 현재 ‘영릉’은 기존의 참도를 다 걷어내고, 옛 조선왕릉의 양식에 맞게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발굴조사를 통해 옛 참도와 개천인 어구(御溝)가 확인이 되었으며, 최초에 세워진 재실의 터가 확인되기도 했다. 따라서 복원이 완료되는 2019년 12월이 되면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세종의 ‘영릉’의 온전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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