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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북벌에 묻혔지만 조선을 안정화 시킨 명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영릉(寧陵)’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1.07 17:29

여주에는 세종(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영릉(英陵)’과 효종(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 이하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자리하고 있는데, 통상 ‘영녕릉(英寧陵)’으로 불리고 있다. 의외로 세종의 능이 여주에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지자체에서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데 비해 효종의 ‘영릉’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 흔히 효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북벌(北伐)을 떠올리기 쉽지만, 오히려 효종의 재위 기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너진 국방과 경제의 회복을 위해 힘을 쏟았던 시기였다. 이때 잠곡 김육(1580~1658)과 같은 인물이 등용이 되어 대동법이 호서지방으로 확대가 되었으며, 상업적인 측면에서 화폐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상평통보를 유통하는 등 민생의 안전을 도모했다. 한편 효종 자신이 ‘삼전도의 굴욕’을 지켜봤던 터라 군비의 확장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북벌이라는 구실을 통해 무너져버린 군사 편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조선은 효종의 시대를 거치며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효종이 북벌이라는 이상을 위해 움직였다기보다 북벌이라는 명분으로 내부적인 불만을 잠재우고, 동시에 시대가 요구했던 군사적인 정비와 경제와 사회에서의 개혁을 통해 조선의 안정화를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조성된 ‘영릉’의 모습
평택시 소사동에 자리한 ‘대동법시행기념비’. 효종 시기 김육의 건의에 따라 대동법이 호서지방으로 확대가 되었다.

■ 예상치 않게 오른 왕의 자리와 정치적 파트너인 우암 송시열

이러한 효종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바로 정통성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조선 왕실의 종법 질서는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었는데, 인조(재위 1623~1649)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1612 ~1645)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으로 시작된다.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경선군(1636~1648)이 있음에도 종법 질서를 무너뜨린 인조의 무리한 왕통 바꾸기는 당시 조정에서 큰 논란을 불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조는 효종의 정통성의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숙청을 하게 된다. 세자빈 강씨(?~1646)의 경우 역모를 이유로 사사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맏이였던 경선군과 차남인 경완군(1640~1648)이 유배 생활 중 세상을 떠나고, 유일하게 경안군(1644~1665)이 살아남게 된다. 훗날 상복을 몇 년 입는가를 두고 벌어진 ‘예송논쟁’이 크게 문제가 된 것도 아직 경안군이 생존해 있고, 논쟁이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안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전면에서 바라본 효종의 능침 공간
효종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우암 송시열의 초상

한편 효종 시대의 조정은 크게 서인 세력에서 분파된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이 붕당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한당의 영수였던 인물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던 김육으로, 산당의 영수는 효종 시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송시열(1607~1689)이었다. 이 시기에 효종과 송시열은 북벌을 매개로 정치적 파트너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략적인 포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애초에 청을 정벌하겠다는 북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자연스럽게 효종이 추진했던 북벌은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송시열도 북벌에 대해서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을 본다면, 효종은 북벌이라는 내부적인 명분과 서인의 대표 격인 송시열을 앞세워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한 측면에서 거론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북벌을 내세워 군비를 강화했지만, 1654년 흑룡강을 두고 청과 러시아가 충돌하자 청의 요구에 의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는데, 이때의 파견을 ‘나선정벌’로 부르고 있다.

전면에서 바라본 인선왕후의 능침 공간
능침에서 바라본 제향 공간의 핵심인 정자각과 참도

■ 최초 동구릉에 조성된 ‘영릉’, 1673년 현 위치로 옮겨지다.

1659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난 효종의 ‘영릉’은 최초 건원릉의 서쪽에 안장이 되었는데, 지금의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홍릉’ 자리다. 하지만 ‘영릉’이 조성될 당시 부실공사가 있었던 탓에 이후 계속된 석물의 균열과 훼손으로 문제가 되었다. 결국 1673년 현재의 위치인 여주시로 천장을 하게 되고, 기존의 자리는 파묘된 채 방치되다가 이후 ‘홍릉’이 조성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영릉’의 최초 장지로 거론된 것 중 수원부의 ‘화산’이 있었는데, 지금의 융릉과 건릉이다. 만약 이때 효종의 ‘영릉’이 화산에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의 수원시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는 이후 왕대비로 봉해진 뒤 1674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효종이 있는 ‘영릉’에 장지가 조성이 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효종과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 1624~1688)가 상복을 몇 년 입는가를 두고 ‘예송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참도에 설치된 금천교, 자연적인 물줄기를 살린 조화로움이 눈에 띈다.
‘영릉’의 재실, 천장 때 만들어진 재실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편 ‘영릉’은 조선왕릉에서 드물게 보이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두 개의 봉분이 상하로 이루고 있는 형태로 아래쪽은 인선왕후의 능으로, 위쪽은 효종의 능이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 인선왕후의 능은 곡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능침 공간은 크게 난간석이 설치된 봉분을 중심으로 앞으로 혼유석과 고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으며,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 각 2쌍이 자리하고 있다. 좌우에는 망주석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 1쌍과 석마 2쌍이 세워져 있다. 또한 ‘영릉’은 특이하게 참도의 중간에 금천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통상 금천교라고 하면 속세의 경계를 구분하는 표시로 인식이 되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홍살문 앞에 인위적 혹은 자연적인 하천에 다리를 놓게 되는데, ‘영릉’에서만 유독 참도의 중간에 금천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물줄기를 그대로 살려 왕릉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조선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관심 있게 볼만한 곳이 재실인데, 통상 제향을 준비하는 시설인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이 파괴되어 복원된 것이다. 하지만 ‘영릉’의 재실은 여주로 천장 되었을 당시 조성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공간 배치도 뛰어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종의 ‘영릉’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던 조선왕릉의 모습과 양난을 거치며 무너진 조선을 안정화 시킨 효종의 공적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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