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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편 - 왕조시대의 종말과 한국사 최후의 왕이자 황제, 순종의 유릉(裕陵)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8.02.05 21:16

한 왕조가 5백년이 이어진 사례는 세계적으로 봐도 흔하지는 않은데, 당장 중국의 왕조들이 채 2백년을 넘긴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은 참고해볼만하다. 성한 것은 쇠하기 마련이라는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가 있는 것처럼, 조선 역시 5백년이 흐르면서 그 국운이 다해갔다. 조선 최후의 왕이면서, 동시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이미 즉위 때부터 허울뿐인 왕이고 황제였다. 순종(재위 1907~1910)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을 강탈했던 일제에 대항해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키며 저항하다가 결국 강제 퇴위를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강제 양위식에 대해 고종과 순종이 반발하며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양위식이 진행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순종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며 차례로 해체해 갔으며, 결국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천황에게 합병을 요청하는 형식을 빌려 최종적으로 경술국치가 이루어졌다. 이는 일제가 대외적으로 대한제국이 원해서 강제병합을 했다는 대외선전을 하고자 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일본의 황족인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와의 혼인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명분으로 이용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조선 왕실은 ‘이왕직’이 설치되어 이때부터 순종은 이왕으로 불리게 된다.

한국사 최후의 왕인 순종의 유릉의 전면 모습
대구 달성공원의 순종 어가길에 세워진 순종의 동상. 대례복을 입고 있는 순종의 모습이다.

■ 허울뿐인 권좌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순종

사실상 고종을 끝으로 순종의 치세는 일제의 강제병합의 징검다리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의 경우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도 해본 반면 순종은 특별하게 저항을 했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말 그래도 허울뿐인 권좌였고, 시대를 잘못 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아울러 순종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을 당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순종의 천황 알현(1917.6.9~26)이다. 의외로 이 같은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민족사적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한편 순종은 기차를 타고 순행을 다녔는데, 이는 철도가 부설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통 순행이라 하면 백성들에게 권위를 보이는 그런 행사였겠지만, 이러한 순행조차도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이 될 정도로 순종은 일제에 의한 얼굴마담 신세로 전락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순종이 융릉과 건릉에 대한 전배를 할 때 기차를 이용한 사실이다. 개인사적으로 순종은 병약한 이미지가 강한데, 이는 김홍륙의 암살 시도가 결정적이었다. 본래 김홍륙이 독살하고자 했던 대상은 고종이었는데, 하필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탄 커피를 함께 있던 순종이 마시면서 크게 앓게 된 사건이다. 대개 순종에 대해 떠올리면 병약하다거나, 바보 같다는 인식이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일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나 순종이 죽은 뒤에 남겼다는 유조는 순종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사례인데, 순종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조가 ‘신한만보’에 게재가 되었다. 유조의 내용은 크게 ‘강린(일제)과 역신이 제멋대로 선포했다는 것’과 ‘이 같은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려 병합 인준에 대한 파기를 염원’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는 말로 유조는 끝을 맺는다. 따라서 한국사 최후의 왕이지만, 개인사적으로 볼 때 불행했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제향 공간인 석물과 침전의 모습. 황제의 능으로 조성된 까닭에 기존의 왕릉과는 차이가 있다.
비각의 내부에 자리한 유릉의 능비

■ 마지막 황제의 능으로 조성된 순종의 유릉(裕陵), 한국사를 통틀어 왕조 시대 최후의 왕릉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고종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의 장례 때 6.10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이후 남양주 금곡동에 자리하게 된 순종의 유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독특하게 하나의 봉분에 3명이 합장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의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유릉에는 순종과 함께 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와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능인 까닭에 앞선 홍릉의 예에 따라 황제의 능으로 조성이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왕릉과는 여러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우선 진입공간에 들어서면 제향을 지내기 위한 재실과 금천교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금천교를 지나게 되면 어정을 만날 수 있는데, 어정의 반대편에 홍살문과 함께 제향이 이루어지는 침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병풍석과 와첨상석, 난간석을 두른 유릉의 봉분.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지만 순종의 치세를 생각하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기존의 ‘丁’자 형태의 정자각과 달리 ‘一’자 형태의 침전은 그 외형부터 틀리며,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참도’다. 기존의 왕릉이 2도로 조성된데 비해, 유릉의 경우 3도로 조성이 되어 있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참도의 좌우에는 석물들이 배치가 되어 있는데, 기존 왕릉의 석물이 능침 공간에 세워진 것과 비교하면 이 또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석물의 배치는 크게 문인석과 무인석,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마석의 순서로 서로 마주 보고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침전의 좌측에는 비각에 세워져 있는데, 안에는 능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유릉의 능침은 고종의 홍릉과 달리 직선이 아닌 것이 특징이다. 홍릉의 경우 침전에서 12시 방향에 능침의 정면이 자리한 반면, 유릉의 경우 침전에서 3시 방향으로 능침이 틀어져 있다. 유릉의 능침은 크게 병풍석과 와첨상석,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이를 보호하기 위한 곡장과 함께 혼유석과 고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1쌍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사를 통틀어 왕조 시대의 마지막으로 장식한 순종의 유릉은 당시의 시대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또한 기존의 왕릉과 차이가 있는 유릉은 겉모습은 화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허울뿐인 권좌에 앉아 허수아비로 살았던 순종의 치세와 맞물리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역사의 교훈을 주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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