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노래를 듣다 보면 율곡 이이(1536~1584, 이하 이이)와 관련해 ‘십만양병 이율곡’이 등장한다. 노래에 등장한 십만양병설의 요지는 변란에 대비해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지금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결과 임진왜란과 같은 참화를 겪었다는 교훈적인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 이 같은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에 등장을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적지 내에 세워진 신사임당의 동상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중략>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년(1582) 9월 1일 기사 중)

다만 위의 내용은 기존의 선조실록에는 없다는 점, 또한 이이 자신이 개혁의 중요성을 밝힌 점은 사실이나 구체적인 수치가 나열된 기록들의 경우 이이의 행장을 비롯해 서인들의 문집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사실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이가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크게 조선 건국 이래 200년의 평화로운 기간 동안 정치와 백성 사이의 간극이 커져, 이를 개선하는 해결책이 있지 않고는 10년이 되지 않아 화란에 대비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율곡 이이가 높이 평가받는 점 역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학문적인 성과에 그치지 않고, 개혁을 통해 정치와 백성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던 행보의 중심에는 민생이 있었다는 점이다.

■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격몽요결과 율곡 이이

이이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이 영남학파를 대표한다면, 율곡 이이는 기호학파를 대표하고 있다. 이이의 경우 조선시대 당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흔히 퇴계 이황이 토대를 닦은 성리학을 율곡 이이가 완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화폐 도안에 퇴계 이황이 천원권에, 율곡 이이가 오천원권에 등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오만원권에 등장하는 인물이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 전 세계의 화폐를 통틀어 어머니와 아들이 화폐도안이 된 경우는 희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이 선생의 신도비각.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 신익성이 글씨를 썼다.

흔히 똑똑한 사람을 영재 혹은 천재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 이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에 관해서는 조선시대와 현재를 통틀어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이는 생전에 총 9번에 걸친 과거시험을 모두 합격했다. 한번 합격하기도 어려운 과거를 9번이나, 그것도 장원으로 합격했던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렀다. 그것도 13살의 나이에 초시에 합격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어린 나이에 행정, 사법, 외무고시 등을 모두 합격한 것과 견줄 수 있다. 이이는 처음 학문을 접하는 이들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는데, 아마 지금 태어났다면 유명한 대입학원 강사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게 한다.

■ 정치와 백성의 간극을 좁히는 개혁, 학문의 성과를 실천하고자 했던 율곡 이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율곡 이이의 진정한 위대함은 학문적인 성과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정치와 백성의 간극을 사회 개혁을 통해 좁히고자 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좋은 제도나 시스템도 시간이 지나면 현실과 맞지 않게 되는데, 당시 조선의 상황이 그랬다. 따라서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은 개혁을 통해 탈선한 궤도를 다시금 복원시키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이이가 주장했던 개혁안을 보면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적재적소의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는 점과 세금 감면을 통한 민생의 구현과 신분제도의 완화 등을 주장했다.

자운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다가 지난 1969년 지방 유림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붕당정치로 인한 당쟁이 격화되면서, 당파에 구애받지 않은 인물을 등용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신분제도의 완화 역시 성리학적 질서와 기득권의 침해로 받아들이는 등 이이의 개혁은 좌초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이의 예상대로 대비를 하지 못한 조선은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 그제야 이이의 개혁에 대해 주목하게 되고, 전시 재상이던 류성룡에 의해 호포법과 면천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이이는 개혁을 통해 민생과 함께 정치와 백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고, 서인의 대표격이었던 이유로 훗날 당쟁의 역사에서 광해군의 폐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서인들에 의해 높여졌다. 지금도 향교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사람이다.

율곡 이이 유적 정화사업기. 지난 1973년 유적정화사업이 있었음을 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이의 묘와 관련한 유적이 자리한 곳이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다. 이곳에는 ‘율곡 이이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이이 선생의 신도비를 비롯해, 자운서원, 이이의 묘와 신사임당의 묘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적지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신도비와 마주할 수 있는데, 보통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의 묘 입구에 세워지는 신도비는 해당 인물의 일대기와 업적 등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이 선생의 신도비는 이항복의 비문과 신도비의 전액은 김상용, 글씨는 신익성이 썼다. 이와 함께 전시관에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과 관련한 유물 112점이 전시되고 있으니 함께 보면 좋다.

자운서원 내에 세워진 ‘묘정비(廟庭碑)’

유적지 내에는 이이와 함께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효종 때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다. 현재의 자운서원은 1969년에 지방 유림에 의해 복원이 되었으며, 서원의 내부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묘정비는 건축물의 건립과 관련한 기록을 새긴 비석으로,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어, 서원에 세워진 경우 보통 ‘서원비(書院碑)’로도 불린다.

이이의 부모 묘.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묘다.

측면에서 바라본 율곡 이이의 묘. 특이하게 봉분이 상하로 되어 있다.

한편 자운서원을 지나면 이이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이이를 비롯해 신사임당의 묘 등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크게 아래쪽에서부터 4개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이의 맏아들인 이경림의 묘를 지나면, 율곡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합장묘로 조성된 율곡의 부모 묘를 지나면 이이의 맏형인 이선과 부인 곽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묘역의 가장 높은 곳에 이이(앞)와 곡산 노씨의 묘(뒤)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 봉분이 상하로 조성이 되어 있으며, 석물의 경우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상석과 향로석이 자리하고 있고, 비석과 함께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자리하고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율곡 이이의 묘. 지난 1973년 유적정화사업의 영향으로 묘역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이하게 일반적인 묘역과 달리 콘크리트 바닥으로 정비되어 있는데, 이는 1973년에 있었던 유적정화사업의 영향으로 지금도 유적지 내에 정화사업기가 남아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부인 곡산 노씨는 임진왜란 때 율곡의 신주를 모시고, 산소로 돌아와 왜군을 꾸짖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기도 했다. 이이와 관련한 유적들은 현재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회 개혁을 통해 정치와 백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던 경세가의 면모를 보인 이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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