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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수원지역의 3.1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2.02 12:54

예전에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브이 포 벤데타>가 있는데,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구절 중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의 5일을(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 구절과 함께 가이 포크스라는 인물이 영국 의회를 폭파하려고 시도하다 미수에 그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일명 ‘화약음모사건’으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이 날은 영화의 복선이 되어 반체제 활동가 브이의 활동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흔히 우리가 어떤 특정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상징물 등을 세우는 것은 위의 저 구절처럼 잊지 않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3.1운동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이자 동시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 깊다 할 것이다.

방화수류정. 이병헌의 <3.1운동비사>를 통해 1919년 3월 1일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3.1운동을 접근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각으로 1919년을 바라보면 일부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 즉 공간적인 의미에서 수원의 3.1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행정과 지리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이야 수원과 화성, 오산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1919년 당시만 해도 이들 세 지역은 수원군으로 통합이 된 상태였다. 즉 수원시와 화성시의 3.1운동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러한 공간적인 의미를 이해할 때 당시 남겨진 사료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이 더욱 뜻 깊은 건 서울과 함께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점으로, 보통의 경우 서울의 3.1만세운동 이후 지방으로 확산이 되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당시 수원 지역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해볼 수 있다.

■ 방화수류정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수원지역의 3.1운동은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장소로 손꼽히는 방화수류정에서 시작된다. 당시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병헌의 <3.1운동비사>를 통해 방화수류정에서 있었던 3.1운동의 단면을 알 수가 있다.

<3.1운동비사>. 수원과 관련한 내용이 아래처럼 기록되어 있다.

“수원 3월 1일, 북문 안 용두각(龍頭閣, 방화수류정)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군중은 이리 저리 피하는 척 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부르자 순사는 깜짝 놀라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만세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 되었다.”

- 이병헌, <3.1운동비사> 중

해당 기록을 통해 방화수류정에서 있었던 첫 수원지역의 만세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또한 당시 3.1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신분과 성별, 나이 등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 계층이 참여하는 특징을 보였다. 여기에 ‘김세환’, ‘김노적’, ‘박선태’ 등의 지식인과 기독교도와 학생 등이 중심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실제 김세환이 재직한 학교가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였다.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3월 16일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서둔동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서호. 3월 23일 소작농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수원지역의 3.1운동은 확산이 되어 3월 16일에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연무대(=동장대)에서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3월 23일에는 지금의 서둔동(=서호)를 중심으로 소작농들이 만세운동이 참여했다. 이들 소작농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건 착취와 생존권에 대한 부분이라는 사회경제적 불만이 있는 상태에서 만세운동이 결합한 형태로 진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원을 비롯한 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만세운동이 장날에 벌어졌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을 기점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화성행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기생

정조는 즉위한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추존 장조)의 현륭원을 수원부의 읍치가 있던 화산으로 이장을 하고, 그 자신은 재위 기간 총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찾을 만큼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도시로서의 수원 화성이 축성이 되고, 여기에 원행길에 나선 정조가 머물 화성행궁(=576칸)이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위엄이 있었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본래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건물로 탈바꿈하게 된다. 우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열었던 봉수당의 경우 ‘자혜의원’이 들어서며 훼손이 가속화 되었고, 신풍루 옆 북군영의 경우 수원경찰서로 활용이 되었다.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훼손이었다.

화성행궁의 봉수당. 일제강점기 자혜의원이 설치가 된 곳으로, 위생검사를 온 김향화와 수원 기생 30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매일신보>에 기록된 김향화의 재판 관련 기사 ‘소요기생공판’

이처럼 훼손된 화성행궁의 봉수당, 즉 자혜의원으로 수원의 기생 30여명이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위생검사(=건강검진)이라는 명목으로 정기적인 검사를 받고 있었는데, 3월 29일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들은 이 자리에서 만세운동을 했던 것이다. 과거 신분질서가 있던 조선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은 신분 중 ‘백정’과 ‘기생’이 있었다. 인간의 취급도 받지 못했던 그들이 식민지가 된 나라의 해방을 위해 만세운동을 했던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감동을 선사해주는 내용들이다. 이후 소요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법원으로 넘겨진 김향화는 보안법 위반을 명목으로 최종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게 되는데, 이는 당시 <매일신보>의 1919년 6월 20일자 ‘소요기생공판’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지정, 지난 2009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게 된다.

팔달산 정상에 자리한 <3.1운동 기념탑>
안동 시내에 설치된 3.1운동 표지석. 수원 관내에서도 이 같은 표지석을 설치해 3.1운동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수원지역의 3.1운동은 방화수류정을 시작으로 확산이 되어 수원군 전체로 확산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소작농이나 기생이 참여한 3.1운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3.1운동에 참여하는데 있어 신분과 성별, 연령 등을 막론한 전 계층이 참여한 특징을 보인다. 한편 앞서 소개한 장소들에서 3.1운동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길은 그대로이지만, 많은 변화의 한복판 속에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장에 3.1운동 관련 표지석이라도 설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관련 내용의 교육과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지점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수원지역의 3.1운동이 조명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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