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2019년 초 화제를 모았던 ‘눈이 부시게’란 드라마에서 배우 김혜자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대사다. 영화 ‘변산’에서도 너무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던 고향 언덕 위에 앉아 배우 김고은이 읊었듯이, 때로는 어느 하루를 눈부신 날로 만들고 때론 “장엄하면서도 이쁘고, 이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저리” 고운 존재인 노을은 지구라는 행성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일 것이다. 힘든 시기에 팍팍한 삶에 지친 우리를 다독여 주기도 하는 석양의 노을 속에서 우린 인생을 관조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지평선 혹은 수평선 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저 해는 정말 저기에 있는 것일까?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질문에는 해가 지려는 순간 그 해는 보이는 곳에 있지 않다는 답을 함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기에 의한 빛의 굴절 때문이다.  빛이 꺾이는 굴절 현상은 보통 한 물질에 다른 물질로 빛이 비스듬히 입사할 때 발생한다. 공기에서 물이나 유리로 입사하는 빛이 꺾이는 현상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대표적인 굴절 현상이다. 빛이 꺾이는 정도는 해당 매질의 성질을 나타내고 이는 굴절률이란 특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빛은 공기를 지나갈 때에도 꺾일 수 있다. 공기의 굴절률은 약 1.0003 정도이지만 온도와 압력에 따라 미세하게 바뀐다. 별빛이 반짝거리는 이유도 공기의 요동과 난기류에 따라 공기의 굴절률이 수시로 미세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 중 온도 편차가 심하고 공기의 요동이 심할수록 반짝거림은 더 심해진다. 한여름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의 열기를 통해 보는 풍경이 이지러져 보이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거대 망원경을 운영하는 천문대에서는 대기의 흔들림에 의해 별이나 은하의 상이 흐려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흔들림을 보정하는 정밀한 광학계를 운영해 깨끗한 상을 얻는 경우가 많다.

대기의 굴절률은 공기의 밀도에 비례한다. 공기의 밀도는 지표면이 가장 높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낮아지기 때문에 공기의 굴절률 역시 지표면이 가장 크고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든다. 대기에 의한 빛의 굴절 현상이 가장 뚜렷이 일어나는 때는 대기 중 빛의 통과가 가장 긴 일출이나 석양 무렵이다. 석양 무렵 햇빛이 지구의 대기를 통과하는 과정을 추적해 보자.

지구 대기권에 진입한 햇빛은 처음에는 굴절률이 작은 상층부의 공기를 통과하다가 내려올수록 굴절률이 점점 커지는 지표면으로 휘게 된다. 석양을 구경하는 사람의 눈에는 이렇게 굴절되어 방향이 꺾인 빛이 들어간다. 그렇지만 사람은 항상 빛이 직진해 들어온다고 느끼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빛의 방향을 직선으로 연장한 곳에 해가 있는 것으로 느낀다. 즉 해의 겉보기 위치는 항상 해의 실제 위치보다 더 위에 보이게 된다. 해의 지름에 해당하는 시야각이 30’ 정도인데 비해 해가 질 무렵 가장 긴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각도는 약 39’ 정도다. 이 얘기는 우리 눈에 해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 혹은 수평선에 닿는 순간 해는 이미 그 아래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해의 위에서 출발한 빛보다 아래에서 출발한 빛이 굴절되는 정도가 더 심하고 이는 해의 아랫부분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더 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에 석양 무렵 해의 모양은 좌우로 더 퍼져 보이는 타원 형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대기의 굴절 현상이 만드는 또 하나의 착시 현상은 뜨거운 도로나 사막 위에 보이는 신기루 현상이다. 뜨겁게 달궈진 도로 위의 공기는 온도가 매우 높아 밀도가 작고 위로 올라갈수록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공기의 굴절률이 도로 근처에서 가장 낮고 위로 올라갈수록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이제 도로 위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을 바라본다고 하자. 숲의 나무에서 출발한 빛은 굴절률이 역전된 대기층을 뚫고 오는 과정에서 굴절률이 작은 도로의 바로 위로부터 굴절률이 높은 하늘 쪽으로 서서히 굴절된다. 대기를 뚫고 오는 석양의 빛과는 반대로 휘는 것이다. 이렇게 꺾인 빛이 눈에 들어오면 사람은 도로 위나 그 밑에 숲이 거꾸로 위치해 있는 것으로 느낀다. 뜨거운 사막에서 푸른 하늘이 모래 위에 오아시스처럼 투영되어 보이는 신기루도 동일한 현상이다.

이처럼 연속적으로 변하는 굴절률을 따라 빛이 곡선으로 굴절되는 속성을 이용한 광학 소자도 있다. 소위 GRIN(gradient-index) 렌즈라 불리는 광학 렌즈는 중심의 굴절률이 가장 높고 바깥으로 갈수록 굴절률이 줄어드는 분포를 띠고 있다. 따라서 평행광이 렌즈에 입사되면 바깥으로 입사된 빛은 중앙 쪽으로 더 많이 꺾이고 중앙 부근으로 입사되는 빛은 덜 꺾이면서 렌즈를 통과한 이후 초점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 눈의 수정체도 일종의 GRIN 렌즈다. 중심의 굴절률이 바깥쪽보다 더 크기 때문에 수정체는 형상뿐 아니라 굴절률 분포에 의해서도 빛을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다.  

불그스레한 빛깔로 온 천지를 물들이는 석양 무렵의 멋진 경치가 이미 대지 너머로 숨어 버린 태양이 대기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에 약간의 배신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빛의 굴절을 통해 노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는 대기에게 오히려 고마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엄하고, 이쁘고, 슬프면서도 고운, 그래서 우리의 하루를 눈부신 날로 만들어주는 노을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지구의 대기에 의한 햇빛의 굴절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도식] (그림: 고재현) 


 [산 뒤로 넘어가기 직전의 석양] (촬영: 고재현) 


 [산 뒤로 넘어가기 직전의 석양] (그림: 고재현)

고재현 교수(한림대학교 나노융합스쿨)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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