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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문화유산,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말해주는 역사의 흔적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6.01 13:50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화유산 중 불교와 관련한 것이 작지 않다. 이 가운데 불상이나 탑은 가장 흔하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문화재를 통해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지점이다. 흔히 가장 잘 만들어진 불상의 예로 경주 석굴암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사실상 신라 문화의 정수로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석굴암이 만들어진 시기는 신라 중대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로, 동 시기에 만들어진 불국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손꼽히는 곳이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석불로, 머리 부분인 불두는 따로 올려둔 모습이다.

처음 석굴암을 방문했을 때 유리창 너머 보이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모습은 여느 불상과 달리 잘 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그 만큼 완벽한 형태의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상의 형태의 변화를 보면 국력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 신라 하대와 후삼국, 고려로 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진 불상을 보면 석굴암과 같은 온화하고 기품이 있는 모습은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특징으로 꼽자면 투박하면서, 거대한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이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암벽에 몸체를 새긴 형태로, 선으로 그렸다 해서 선각(線刻)으로 불린다. 여기에 머리에 해당하는 불두는 따로 얹는 방식으로, 이러한 불상의 예는 안동의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이나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22호), 영주 강동리 마애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4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불상의 이름에도 정체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 ‘파주 용미리(소재지)+마애(불상의 재질)+이불(어느 부처, 두 기의 불상)+입상(불상의 형태, 서 있는 모습)’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세워진 당시의 시대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미륵신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우선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어느 불상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갓을 쓴 형태나 손에 연꽃의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미륵불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는 작년 국보로 승격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국보 제323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형태나 특징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다른 불상들과 달리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두 기의 불상이 함께 자리한 모습으로, 좌측의 연꽃줄기를 쥐고 있는 불상과 달리 우측은 두 손을 합장한 모습이다.

미륵불임을 알 수 있는 특징, 갓과 손에 들고 있는 연꽃줄기
작년 국보로 승격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그럼에도 갓을 쓰고 있어 좌우측 불상 모두 미륵불로 보인다. 안내문을 보면 두 기의 미륵불에 대해 좌측은 남성, 우측은 여성을 표현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전체적인 외형은 거대한 마애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불상의 표정이나 전체적인 모습은 투박하지만 상당히 잘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당 마애불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는데, 우선 불상이 만들어진 설화를 통해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다.

불상 아래 새겨진 명문. 성화칠년과 세조대왕왕생정토 등의 명문을 통해 조선 초기에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해당 설화는 크게 고려 선종(1049~1094) 때 두 기의 바위에 불상을 새긴 결과 원신궁주와의 사이에서 왕자(=한산후)가 태어났다는 것이 요지다. 반면 불상이 있는 암벽에 새겨진 명문에서 성화칠년(成化七年)과 세조대왕왕생정토(世祖大王往生淨土) 등이 확인되면서 해당 불상이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조선 초기의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지점이다. 실제 명문에 언급된 세조의 경우 스스로 호불군주를 자처할 만큼 불교에 호의적이었고, 파주 일대에 조선왕실의 능묘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우측편의 불상. 특이하게 두 손이 합장을 한 모습이다.

반면 마애불의 조성 설화를 토대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면 이 불상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문화재다. 예전에 소개한 바 있는 하남 태평이년명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처럼 후삼국과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성행했던 것 중 약사신앙과 함께 미륵신앙이 있다. 미륵불은 쉽게 현재의 부처가 아닌 미래에 출현하는 부처로, 현실은 고난하고 어렵지만 미래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백성들에게 주었기에 미륵신앙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백제의 미륵사는 선화공주의 요청에 의해 미륵삼존의 출현과 연못을 메워 만들었고, 현재 미륵사지 석탑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화산 아래 자리한 미륵사지. 우리 역사에서 성행했던 미륵신앙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지점이다.

또한 신라 말과 고려 건국에 이르는 혼란 속에 백성들은 이를 극복해줄 구원자, 즉 영웅의 존재를 간절하게 바랬고,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궁예(재위 901~918)였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그 결과 태봉(후고구려-마진-태봉)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국적으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미륵불은 ▲후삼국과 고려 초기에 이르는 시대상 ▲조선왕실과 불교의 관계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바위에 조성된 거대한 불상 그 자체도 훌륭하지만, 여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때 “알면 다르게 보인다”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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