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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말 그릇 채우고 비우기’
이소영 기자 | 승인 2020.01.12 08:39

“지금 한창 돈 벌어야 할 때인데, 평일 오전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돼. 부지런히 돈 모아야지!” 얼마전 60대 중반의 여성에게 들은 말이다. 장소는 공공도서관 강당, 요가 수업이었다.

웬만하면 공감지수가 높은 나인데, 당황했었다. 무슨 말을 다시 던져줘야 할지 캄캄했다. 겸연쩍어 얼굴 근육이 굳었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은 갈라진 내 맨발 뒤꿈치. ‘어휴, 로션이라도 바르고 올걸.’ 애꿎은 뒤꿈치 탓만 했다. 1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첫 요가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명사와 형용사를 곱씹었다. ‘돈’, ‘일’, ‘부지런함’.

​사람의 ‘말’, ‘언어’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맥락을 함께 한다. 그녀의 숙성된 생은 어떠했을까. 남편이 사업 또는 보증으로 돈을 잃어 그 돈을 갚느라 지난한 시간을 바쳤을 수도 있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그 돈으로 자식들 대학을 보내고, 시집 장가를 보내고, 자식 농사를 잘 지은 뿌듯함을 어깨에 잔뜩 무장한 채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난생처음 본, 잘 알지 못하는 여성 때문에 서글퍼졌다.

​평일 오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운동을 하러 오는 엄마는 시간에 이어 돈까지 낭비하는 여성일까. ‘조언’이자 ‘충고’처럼 한 그 ‘말’ 때문에 나의 ‘마음’은 잠시 먹먹했고 희뿌연 안개가 낀 듯 퀴퀴했다.

​‘말’이라는 녀석은 참 묘하다. 내뱉으면 휘발되어 순식간에 날아가지만, 그 잿더미는 사람의 가슴 한 구석에 남는다. 그리고 때론 칼에 베인 상처보다 말에 베인 상처가 더 아프다. 나는 ‘2020년 계획’보단 ‘2020년 명언’을 만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왜 교회에서는 새해 성경 문장을 뽑지 않던가. 그렇게 만든 문장. ‘말 그릇을 비우고 채우자.’

다시 요가에서 들었던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 그 어르신은 내 ‘팔자’가 좋아 보였던 걸까?

누구나의 삶은 힘들다.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하기 위해 이것저것 발품을 파는 취업 준비생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며 인터넷 강의를 하루 종일 앉아 듣는 공무원 준비생도, 우울증으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이도, 난임으로 인해 배란유도제를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놓아야 하는 여성도. 모두가 저마다의 상황과 마주한 현실의 문턱, 장벽을 깨며 산다.

요가를 다녀온 다음날, 세탁실에 들어갔는데 다리가 많이 달린 지네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한테 호들갑 떨며 ‘벌레 보고’를 하니, 고작 100센티 조금 넘는 다섯 살 난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내가 지켜줄게!” 아들의 ‘말’은 나의 닫힌 창 하나를 열어놓았다. (물론, 벌레 처리는 내 몫이었지만.)

​어쨌거나, 2020년은 정말이지 말 그릇을 비우고 채우고 싶다. 김윤나 작가의 책 ‘말 그릇’ 중 프롤로그에 나오는 문장처럼, 필요한 말을 제때 하고, 후회할 말을 덜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 말이 민들레 씨가 아닌 잿더미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 지충에 쌓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여 2020년을 살아갈 이들에게, 김재진 시인의 말을 빌려 “산다는 일이 저마다 견디는 일이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다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숱한 말에 채이지 맙시다!)

이소영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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